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에서 전격적으로 물러나고 해리스 부통령이 바통을 이어 받으며 미국 대선의 향방은 더욱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 첫 임기 당시부터 시작된 미중 무역 갈등이 지속되거나 심화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공급망 재편은 지속될 것이며, 무역으로 시작된 미중 간 갈등은 다른 정치적, 지정학적인 문제들과 얽히며 국제 사회에 여러 충격파를 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그 여러가지 경우의 수 중에 트럼프 후보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한국의 선택지는 더욱 좁아지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렇듯 글로벌 경제가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지만, 동남아만큼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중 갈등으로 인한 유탄을 우려하고 있지만, 동남아 시장은 불안정한 중국 시장을 탈출하는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어찌보면 미중 갈등으로 인해 수혜를 받고 있는 것이 동남아 시장인 셈이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중국에 있던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했고, 일본 자동차 기업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생산거점으로 삼은 태국을 넘어 인도네시아까지 공장을 확장하는 중이다. 한국의 현대차 역시 동남아 지역 최초의 완성차 생산 거점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외곽에 마련했다.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을 비롯해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부르나이 등 10개국을 통칭해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으로도 불리는 동남아 시장이 이렇듯 부상하는 이유는 단순히 미중 갈등의 반사 효과만은 아니다.
전체 인구를 합치면 6억명이 넘어가는 동남아 시장은 이미 기업들에게 매력적인 소비 시장이기도 하다. 실제 젊은 인구, 급성장하는 중산층을 기반으로 동남아 각국의 일선 도시의 소비력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 더구나 싱가포르의 경우는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아시아 태평양 지역 무역과 금융의 대안으로 떠오르며 이미 지난 2022년 1인당 GDP가 8만달러를 넘어서는 부유한 국가로 부상했다. 도시국가라는 특성이 있지만, 그래도 한국의 두배가 넘는 수준이다. 지금도 싱가포르는 물밀 듯 들어오는 해외 투자로 더 큰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한국 기업, 그 중 스타트업에게 이러한 동남아 시장이 더 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렇듯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동남아 시장 진출을 고려하는 한국 스타트업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최근 동남아 시장의 트렌드와 기업 환경을 얼마전 아산나눔재단 ‘마루 파이어사이드챗’을 통해 진행된 권혁태 파인벤처파트너스 대표를 통해 들어봤다.
한국과 동남아 스타트업 대상 투자 진행
권혁태 파인벤처파트너스 대표는 캐나다 퀸즈대 경영학과(Queen’s University in Canada)를 졸업하고 골드만삭스 일본과 싱가포르 오피스에서 일했다. 이후 싱가포르 금융 통화청(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에 등록된 금융 투자회사(Registered Fund Management Company)인 파인벤처파트너스를 설립했다. 현재는 시장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스타트업이 있는 동남아, 한국 회사들에 장기적으로 투자하며 글로벌 진출을 돕고 있다. 이날 발표에 나선 권 대표는 “2019년 창업 후 주로 기술 기업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며 운을 뗐다.
“저희는 특히 세상을 좀 더 이롭게, 스케일러블하게 바꿀 수 있는 회사, 창업자들에게 투자를 하고 그 여정에 동참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투자사 입니다. 현재는 동남아를 중심으로 투자를 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투자를 시작하고 있죠. 주로 프리 A 단계부터 시리즈 B 투자를 진행하는데 포트폴리오사는 주로 지속가능성, 라이프스타일 관련 기술 기업들입니다.”
과거 권 대표는 ‘아기상어’로 유명한 ‘핑크퐁’이 중국 진출 당시 엔젤 투자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한국 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는 과정을 지켜본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동남아 기업들의 동북아·영미권 진출, 한국 기업의 동남아·영미권 진출을 지원하며 포트폴리오를 쌓고 있는 중이다.
권 대표는 “LP로 나서는 동남아 대기업들을 통해 유럽이나 미국 수출에서 상당히 많은 매출을 일으키고 글로벌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같이 투자하며 적잖은 것을 배우고 있다”며 그 노하우를 동남아 시장 진출, 나아가 글로벌 진출을 계획 중인 한국 기업 지원을 통해 공유하고자 하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동남아는 한 단어로 정리하기 어려운 시장
본격적인 동남아 시장의 이야기로 넘어가며 권 대표는 “10개나 되는 아세안 국가들을 다 아는 것은 무리수”라며 싱가포르에 있으면서 동남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제로 말을 이어갔다.
“싱가포르에 있으면서 동남아를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확장됐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싱가포르에 아시아 본사를 만들기도 하고 자금을 운용하고 교류하기 때문이죠. 동남아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에 비해 평균 연령대가 매우 낮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평균 연령이 30세 수준이예요. 현재 가장 큰 글로벌 트렌드 중 하나가 미중 갈등이지만, 동남아는 그 수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권 대표에 따르면 그 중에서도 싱가포르는 정보와 자금이 집중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권 대표는 “한국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그 플레이북을 그대로 동남아 시장에 적용할 경우 실패할 수 있다”며 “동남아 진출을 고려하는 스타트업이라면 제로 베이스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적용됐던 방식이 싱가포르 같은 곳에서 적용이 안되는 경우도 있어요. 말레이시아와 태국은 너무나 다른 나라죠. 또 인도네시아와 필리핀도 전혀 다른 나라고요. 특히 베트남의 경우는 한 국가 내에서도 하노이와 호치민이 상당히 다른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먼저 리서치를 한 뒤에 각 기업의 사업 방향에 맞는 시장을 선별해 들어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죠.”
잠재력은 무시 못해, 일선 도시들은 이미 급성장 중
각국의 성향이 제각각인 반면 그 잠재력은 다양하다. 우선 공통점은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북아 3국이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을 이어온 것처럼 동남아 각국 역시 준수한 성장 지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싱가포르와 인접한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라는 특성이 있다.최근 몇 년 간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률은 6~7%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준수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국가의 경우 한국과 일본, 혹은 중국에 있던 양질의 산업들이 넘어오며 국민들의 소비력이 올라 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를 살필 필요가 있죠. 한국 역시 서울 경기권을 중심으로 한 10개 정도의 대도시로 산업이 밀집돼 있고, 스타트업의 경우 그 환경에서 PMF(시장적합성)을 찾았을 때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기업들이 많이 나왔던 것과 같이 동남아 시장도 그런 관점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권 대표가 파인벤처파트너스의 투자를 결정할 때도 적용된다. 스타트업의 비즈니스와 창업자를 볼 때 동남아 각국의 일선 도시를 빠르게 장악할 수 있는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인도네시아의 평균 GDP가 아니라 수도인 자카르타의 GDP가 급성장했다는 점입니다. 이미 2만달러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의 경우도 2만 6000달러죠. 이미 8만달러를 넘어선 싱가포르는 두말할 필요가 없고요. 전체를 보면 격차가 크겠지만, 일선 도시만 보면 소비력과 생산성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K-컬처에 열광하는 MZ세대들, 한국에게 동남아는 리스크 헷징 시장
문화와 종교, 화폐, 규제가 제각각인 동남아 각국이라지만 한국 기업에게 유리한 또 한가지는 바로 K-컬처에 반응하고 있는 MZ세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비슷한 스마트폰을 쓰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애용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소비 패턴 역시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이 권 대표의 설명이다.
“현재 케이팝과 케이푸드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곳이 인도네시아입니다. 무슬림이 많은 인도네시아에서 인접한 무슬림 국가인 말레이시아로 넘어가며 계속 퍼져 나가는 양상을 보이죠. 그럼 면에서 각국이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일면 상당히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권 대표는 “동남아 시장은 미중 갈등으로 영향을 받는 각국 시장과 달리 자생적으로 성장하며 내수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수출주도형인 한국 경제가 미중 갈등으로 영향을 받을 때 리스크 헷징을 위한 지역으로서 동남아 시장이 굉장히 매력적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제가 자산운용사 대표로서 동남아, 그 중에서도 싱가포르를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일단 세금이 매우 낮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양도세나 배당세와 같이 아예 세금이 적용되지 않는 부문도 많죠. 두 번째는 동남아 전체 VC 활동의 50% 정도가 싱가포르에서 이뤄진다는 겁니다. 싱가포르에서 핀드를 운영하면 수익에 대한 세금이 없기 때문이죠. 또 펀드를 만드는 룰 베이스가 영미법을 따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영어로 돼 있어 글로벌 투자자들이 이 펀드에 출자할 때도 상당히 편리하다는 것 역시 장점입니다. 그로 인해 싱가포르에는 많은 기업들의 R&D 역량이 집중되고 있기도 하죠.”
권 대표가 꼽는 대표저인 사례가 코로나19 백신으로 유명해진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다. 이 회사는 15억달러(약 2조 793억원)를 싱가포르 R&D센터에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경우 현대차가 이노베이션센터를 설립했고, 청소기로 유명한 다이슨도 본사를 싱가포르로 옮기며 R&D 인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 밖에도 빅테크로 불리는 메타, 애플, 구글 역시 아시아태평양 본사를 싱가포르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발표 말미, 권 대표는 “첫 직장이었던 골드만삭스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많은 변화가 있었다”며 재차 동남아 시장의 잠재력을 강조했다.
“동남아 시장은 경제력에서 많은 성장을 이뤘고, 소비력 또한 많이 올라왔습니다. 또 이들 국가들은 아세안이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해 미국, 유럽 국가들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고요. 점차 글로벌 무대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인터넷도 바로 모바일로 넘어가며 디지털 전환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죠. 인도네시아의 경우 틱톡과 페이스북이 각각 글로벌 2위, 3위 시장으로 꼽히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바일 기반의 시장이 잘 구축돼 있다는 점은 한국 스타트업에게 상당히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