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째 이어지고 있는 스타트업 투자 혹한기에 더해 고물가·고금리 부담이 더해지며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위기는 커지고 있다. 이에 정부는 최근 스타트업계 지원을 대폭 확대하고 모태펀드 출자를 스타트업코리아, 글로벌, M&A 등 핵심 출자 분야의 혁신 스타트업 투자에 집중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주목되는 변화 중 하나가 국외 창업 스타트업 지원이다. 정부는 국외 창업 스타트업에게 해외시장 진출 자금을 3년간 6억원 지원하고 글로벌 멘토링과 현지 네트워크 연계 등을 지원하는데 내년 100억원의 예산 지행을 예고했다. 이미 지난 8월부터 국외창업기업 지원의 근거가 되는 개정 ‘중소기업창업 지원법’이 시행에 들어간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국외 창업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해외 진출 전략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최근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진행한 ‘아시아의 한국인’ 행사에서 찾아봤다.
플랫폼 성격의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동남아 금융·투자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미중 갈등을 비롯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무력충돌 등은 향후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상황이 급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불확실성은 글로벌 경제 역시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독 동남아 지역만큼은 예외라 할 수 있다. 미중 무역 갈등, 대만 무력 출동 가능성 등으로 인해 불안정한 중국 시장을 탈출하는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동남아 지역은 꽤 매력적이 대안으로 다가오고 있다. 여전히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고, 향후 잠재력 또한 높게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을 비롯해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부르나이 등 10개국을 통칭해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으로 불리는 동남아는 전체 인구를 합치면 6억명이 넘어가는 거대 소비시장이자, 젊은 노동력이 넘쳐나는 생산기지라 할 수 있다.
그중 싱가포르는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아시아 태평양 지역 무역과 금융의 대안으로 떠오르며 이미 지난 2022년 1인당 GDP가 8만달러를 넘어서는 부유한 국가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제는 중국과 미국의 자본이 몰리며 스타트업들에게 글로벌 혁신 허브이자 기회의 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날 ‘글로벌 혁신 허브, 싱가포르 스타트업 트렌드’를 주제로 발표에 나선 정재혁 ES 인베스터 대표는 산업은행 싱가포르 VC(벤처캐피탈) 전문 데스크 출신의 투자 전문가로서 인사이트를 공유했다.
“싱가포르는 인구 600만 정도의 작은 국가입니다. 하지만 1인당 GDP는 글로벌 5위에 달하는 부자 국가죠. 싱가포르가 이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플랫폼 성경을 가진 도시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인구 6억 이상의 아세안 국가에서 싱가포르는 인구와 자원 면에서 강점을 가진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과 함께 벤처 생태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 대표가 강조하는 동남아 시장 접근법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로 시작된다. 10개국 인구 6억의 거대 시장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각각의 나라 별 법과 제도, 언어, 종교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 중심의 딥테크 보다는 소비시장의 발달에 따른 이커머스와 푸드, 관광 분야 스타트업의 성장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이 있다. 정 대표는 “소비시장이 크다보니 스타트업 생태계도 한국과 발달 양상이 좀 다르다”며 말을 이어갔다.
“각각의 섹터에 IT 요소들이 접목돼 있긴 하지만 한국과 달리 딥테크 분야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커머스는 가장 주요한 산업군이죠. 그 다음 인도네시아처럼 섬으로 구성된 국가들이 많다보니 이동이나 푸드 분야가 많이 발달돼 있습니다. 또 관광 산업과 미디어, 핀테크 쪽도 상당히 유망한 업종으로 부상하고 있죠. 팬데믹 이후에도 성장률 측면에서 세계 어느 지역보다 안정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예요. 그러한 이유로 중국과 미국 자본이 몰려들며 벤처 투자 시장이 엄청나게 급성장을 해 왔죠.”
하지만 동남아 시장 역시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의 여파는 피해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 대표는 “최근 한국이나 다른 권역처럼 투자 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도 “여전히 드라이 파우더(집행되지 않은 투자 자금)는 많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동남아 시장에서 싱가포르는 금융 중심지이자 벤처 투자허브로 도약하며 그 위상을 달리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 해협에 위치해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국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언어도 4개의 공식 언어를 쓰고 있죠. 화교들이 쓰는 만다린, 영어, 말레이어, 인도의 타밀어 등이예요. 또 글로벌 투자 분야에서 서울이 10위권인 반면 싱가포르는 3위를 기록할 정도로 투자 분야에서는 상당한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동남아에 펀드를 유치했던 대부분의 유니콘 기업, 스케일업된 기업들의 본사가 싱가포르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죠.”
싱가포르는 스타트업 혁신의 허브이자 훌륭한 ‘테스트베드’
앞서 언급된 지정학적인 중요성, 글로벌 투자 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싱가포르는 스타트업 혁신의 허브로 주목받고 있다. 동남아 각 주요국에서 창업을 하는 스타트업들이 대부분 본사를 싱가포르에 두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 대표는 싱가포르가 스타트업 혁신의 허브로 떠오르는 다양한 이유를 연이어 설명했다.
“싱가포르가 투자 시장으로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에 비해 싱가포르에서 투자를 받을 경우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예요. 특히 싱가포르에서 창업하거나 본사를 이전한 스타트업이 그렇죠. 싱가포르 정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스마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어요. 작은 국가인데다 ICT,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어 스타트업들에게 훌륭한 테스트베드로도 인식되고 있죠.”
그 외에도 정 대표는 고급인력과 더불어 대부분의 글로벌 빅테크가 아시아태평양 본부를 두고 있다는 점을 싱가포르의 특징으로 꼽으며 한국 스타트업이 직면할 다양한 상황을 스왓(SWOT) 분석을 통해 공유했다.
“벤처 투자 측면에서 싱가포르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가깝습니다. 모든 투자 계약서가 영미법에 근간을 두고 있죠. 또 글로벌 최고 수준의 스마트 인프라를 구축하려 노력 중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우수한 스타트업들에게는 기회라고 할 수 있죠. 또 싱가포르에 지사 설립이나 플립(본사 이전)을 할 경우 행정적인 절차가 상당히 용이하게 돼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만 고급인력이 존재하지만 획일화된 교육으로 인해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점, 높은 임금과 물가는 걸림돌이라 할 수 있죠.”
이어 ‘테스트베드로서 싱가포르, 한국 스타트업의 활용전략’을 주제로 발표에 나선 김정준 에스 이노베이션스 대표는 앞서 정 대표가 언급한 싱가포르의 여러 장점과 더불어 세금이 낮다는 점을 언급하며 ‘돈 버는 맛이 나는 나라’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법인 계좌 개설 등에 있어 엄격한 규정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말을 이어갔다.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할 때 장점 중 하나는 국제적인 신뢰성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다만 인건비가 너무 비싸다는 점은 저희 역시 딜레마였습니다. 적지 않은 임금을 주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현지 직원을 뽑기가 힘들죠. 그래서 저희의 경우 싱가포르를 정 대표님 말처럼 테스트베드로서 활용하는데 집중했어요. 인구가 적은데다 기술 수용도도 낮고 보수적이라는 단점도 있었기 때문이죠. 즉 사업 특성에 따라 싱가포르에는 전략적인 허브만 두고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를 주요 공략 국가로 설정하는 것이 좋을 경우도 있어요.”
특히 김 대표는 일반 소비자의 구매력과 기업의 구매력을 잘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득 수준이 높은 국가라고 해서 기업들의 성향은 솔루션이나 인프라 많은 투자를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B2B 분야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싱가포르 진출을 고려하는 스타트업이라면 시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우선돼야 합니다. 자주 방문해 인맥을 만들고 천천히 접근하는 방식을 추천합니다. 저라면 법인 설립 이전에 최소 두개 정도의 고객이나 믿을 만한 파트너를 구하고 들어올 겁니다. 산업 별로 다르겠지만, 싱가포르에서 사업하기 어려운 분야라면 애초에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을 목표로 하고 거쳐가는 테스트 마켓 정도로 전략을 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예요.”
탑다운 방식으로 접근 한다면 싱가포르는 훌륭한 ‘쇼케이스’ 될 수도
이날 싱가포르 세션의 마지막 발표에 나선 조준호 클라이원트 대표는 ‘아시아의 쇼케이스는 싱가포르가 제맛이다’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조 대표는 10년간 싱가포르를 비롯해 중국과 홍콩 등 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영업을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클라이원트를 창업, AI 기반 RFP(제안요청서) 분석 자동화 솔루션을 개발했다. 지난해 9월 법인설립 3개월 뒤 서비스를 출시한 클라이원트는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협업 파트너로 선정된 데 이어 ‘모스트 AGI 포텐셜 어워드(잠재력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20억 규모의 프리A 투자 유치에서 성공하며 싱가포르 진출에 나서고 있다.
명지대 컴퓨터공학과 00학번인 조 대표는 2009년 IT 솔루션 개발사인 엘토브 창립 멤버로 메타버스 내 기업 홍보관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당시 메타버스 수요가 감소하며 키오스크 제작 사업으로 방향 전환을 했고 그런 그에게 싱가포르는 기회의 땅이 됐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소셜 트리 입찰제안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죠. 그것을 계기로 개발자에서 영업 담당자가 됐어요. 수주를 한 뒤에도 모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테스트를 한국에서 완료하고 패키징해 싱가포르로 가져가 데모를 했죠. 물론 이수에도 쉽지 않았어요. 1년 동안 하드웨어 디자인도 굉장히 많이 바뀌었죠. 창이공항 CEO 앞에서 발표를 여러 번 했는데, 디테일하게 UX 개선을 요구 받기도 했고요. 세 달 간 싱가포르 공항에서 살면서 사업을 완료했습니다.”
이후 소셜 트리는 훌륭한 레퍼런스가 되어 중국과 홍콩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것이 조 대표의 설명이다. 싱가포르 법인도 없는 상황에서 열정으로 따낸 사업과 성과를 내기까지 쉽지 않았던 과정은 이후 조 대표의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 됐다. 결과적으로 엘토브는 아시아는 물론 국내에도 그 성과가 조명되며 롯데, 현대, 신세계 백화점 등에 키오스크를 도입, 시장 점유율 90%를 달성하기도 했다.
“지난 경험을 통해 저는 탑다운 방식이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이공항 사례를 만들고 싱가포르 내 많은 쇼핑몰에서 수주를 했고 이것이 글로벌로도 이어졌으니까요. 이른바 ‘탑다운 임팩트’인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클라이원트 역시 탑다운 방식이 글로벌에서 통한다고 믿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 최대 고객인 창이공항과 RFP를 생성하는 PoC(개념증명)을 진행하고 있고 포춘 100대 기업에 포함된 서모피셔사이언티픽(Thermo Fisher Scientific)이란 미국 회사와 계약을 맺어 HR 분석 솔루션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어 클라이원트는 지난 9월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학과 업무협약을 맺고 산학 연구도 진행 중이다. 글로벌 입찰 시장의 현황과 문제점을 분석하고 클라이원트 서비스의 실효성을 검증하기 위한 과정이다.
“창업 1년만에 미국과 싱가포르를 동시에 진출합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은 너무 빠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셨지만, 전 그렇게 일 해오지 않았으니까요. 해외 진출에 적당한 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장한 후에 해외 진출하겠다는 생각 보다는 모든 것을 걸어야 성공한다는 생각 뿐입니다. 제 꿈은 세계 정복입니다. 세계 모든 프로젝트를 다 저희 플랫폼에 넣고 수요 기관과 공급 기업을 연결해주는 거이 저희 꿈이자 큰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