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2년 9월 전설적인 벤처 투자자인 존 도어가 스탠포드에 11억 달러(한화 약 1조5000억원)을 기부해 설립된 스탠포드 도어 지속가능대학(Stanford Doerr school of sustainability, 이하 도어 스쿨)이 스타트업 전문 법무법인 미션과 공동 기획으로 제 4회 ‘스탠포드-아시아 지속가능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지난달 29일 역삼동 GS타워에서 개최된 이번 행사는 스탠포드 전문가를 비롯해 법조인,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모여 탄소 중립을 위한 생태계 및 규제를 분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기업과 스타트업의 전략과 사례가 소개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급속히 악화되는 기후 위기의 상황 속에서 미국, EU를 비롯해 우리나라 정부의 대응 정책과 기업들의 노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날 행사는 김소형 스탠포드 푸드디자인랩 교수와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대표 변호사의 개회사로 시작됐다.
김 교수는 “지난번 블루카본에 이어 오늘은 탄소 중립을 주제로 기업의 전략과 정책에 집중해 진행해 보겠다”며 도어 스쿨의 설립 배경을 비롯해 지구과학, 오션, 에너지, 베터리,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정책과 법에 대해 집중 연구하고 있는 현황을 설명했다. 이 외에도 김 교수는 스탠포드 대학 내에서 자체 에너지 생산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사실과 푸드디자인랩에서 메타, 구글, 아마존 등과 진행하는 재생에너지 관련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어 공동 기획한 법무법인 미션의 김성훈 대표 변호사는 “투자자들과 함께 소셜 벤처들을 지원하면서 처음 창업 생태계의 업무를 시작하게 됐다”며 “다음 세대를 위한 더 좋은 사회는 여전히 계속되는 우리의 미션”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지난 1월 스탠포드 대학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학문, 전공, 산업을 넘어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고 해법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본 가장 인상 깊었던 시간”이라고 돌이키기도 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실질적인 노력들 조명
이날 이어진 본 행사에서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GSB)와 도어 스쿨에 재학 중인 주영철 씨가 ‘탄소중립을 위한 파리기후협약과 우리의 노력(Toward Carbon Neutrality : Paris Climate Agreement and Our Effort)’을 주제로 첫 발표에 나섰다.
발표를 통해 그는 “기후 위기가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거치며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며 “기후 위기는 인간에게 실존적 위협을 주고 있는 주제로 많은 학생과 환경 단체들이 끊임없이 싸워왔지만 아직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파리기후협약을 통해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진행해 온 노력들을 언급하며 기후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이산화탄소 배출량’보다 ‘포화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파리기후협약에서 지구 평균 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시대 대비 2도 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상승폭이 최대 1.5도를 넘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에 가깝다”며 “현실적으로 1.7도를 목표치로 할 경우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어 ‘KIA 탄소 중립’을 주제로 정순혁 기아 탄소중립 전략팀 책임 매니저가 발표에 나섰다. 정 매니저는 “기아는 ‘지속가능한 모빌리티 솔루션 프로바이더’라는 비전 아래 오는 2045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기아가 자동차를 생산하는 밸류체인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 현황을 소개하기도 했다.
정 매니저는 기아의 RE100(재생에너지 100%) 달성을 위한 친환경 제조 로드맵을 제시하며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각 생산단계를 넘어 판매한 차량을 고객들이 타고 다닐 때 발생할 수 있는 부분, 즉 스콥3(기업 활동과 연관된 가치사슬 전체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까지 고려하는 탄소 중립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정 매니저는 기아가 진행하고 있는 ‘오션클린업 파트너십’ ‘갯벌 식생복원’ ‘바이오차 프로젝트’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바이오차: 바이오매스와 숯을 의미하는 ‘차콜(Chrcoal)’의 합성어, 토양과 대기를 살리는 물질
다음 발표는 스탠포드 로스쿨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원기 씨가 이어받았다. ‘미국 내 ESG 관련 리걸 트렌드’를 주제로 발표에 나선 그는 환경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 간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미국 내 ESG 문제를 언급하며 “반(反) ESG 법안을 발의하는 주가 급증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미국 전역에서 지난해에만 반 ESG 법안이 발의된 건수가 150건을 넘는다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법안들이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해 기각되거나 논의가 진정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18개 주에서 40건의 반 ESG 법안이 통과·개정됐다”며 “이들 법안은 공공기관이 투자 결정시 ESG 관련 요인을 고려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법안이 통과되는 주는 대부분 보수 색이 짙어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주들에 해당한다. 반면 캘리포니아의 경우는 이와 달리 ESG와 관련한 강력한 규제 법안을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발표에 따르면 캘리포니아는 지역 내 기업 중 연간 매출 10억 달러(약 1조 3000억원) 이상인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스콥 1, 2, 3) 연강 공시 의무화를 담은 ‘SB 253’을 비롯해 연간 매출 5억 달러 이상 기업에게는 2년마다 자사의 기후 리스크에 대한 공시를 의무화하는 ‘SB261’, 탄소 감소 또는 산소 순배출 제로 주장을 하는 기업의 경우 이를 뒷받침하는 ‘자발적 탄소 상쇄 상세 거래 내역을 자사 웹사이트에 공개 의무화한 ‘AB 1305’, 벤처 투자사 등을 포함해 투자사가 투자하는 기업의 창업자 및 경영진 구성원의 인종 등을 포함한 다양성 통계를 연간 보고 하도록 의무화한 ‘SB 54’ 등의 ESG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이원기 씨는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SEC(미국증권거래위원회)가 진행해 온 ESG 법제화 내용을 소개하며 “초안이 워낙 파격적이어서 이후 코멘트를 반영해 최종안에서는 스콥3 공시 의무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SEC가 이 ESG 법안을 통해 집행 조치한 브라질 광산 회사 사례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기업들이 주목해야 할 ESG 리스크, 그리고 ‘그린워싱’ 문제
이날 심포지움에서 특히 주목도가 높았던 것은 윤용희 법무법인 율촌 파트너 변호사의 ‘탄소중립 규제로 인한 사업환경의 변화와 도전’ 주제 발표였다. 스탠포드 LLM(로스쿨) 출신이기도 한 윤 변호사는 지난 소회를 밝히며 ‘ESG 리스크’ 관점을 이야기했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ESG 경영을 하겠다고 하기 이전부터 법에 의해 공적 규제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논의는 투자자, 주주, 임직원, 협력사, 해외 고객사와 소비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적정하게 고려하는 자본주의 맥락에서 더 중요도가 커지고 있습니다. 매출과 수익률을 중심으로 회사를 평가하고 투자하는 것을 넘어 비재무적 요소, ESG 정책 성과 등을 공시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중이죠. 특히 유럽 고객사로부터 정말 많은 압박을 받고 있어요. 과거에는 가격과 품질을 봤다면 이제는 ESG 리스크도 없어야 한다는 거죠.”
실제 유럽에서는 EU 주도로 CSRD(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 기반 세부 공시표준인 ESRS(유럽지속가능성보고표준)을 제정하고 CSDDD(공급망실사법)이 가결된 상태다. EU에 속한 독일, 프랑스 등 각 국가는 이에 준해 각국의 ‘공급망실사법’ ‘기업인권실사법’ 등의 법안을 제정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윤 변호사는 “결국은 유럽에 있는 대기업은 물론 유럽에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들은 회사 뿐 아니라 자회사, 공급망의 리스크를 잘 관리하라는 의미”라며 “관리하지 않으면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심각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변호사에 따르면 실제 EU의 기업 등이 한국 로펌에 의뢰해 현장 실사를 진행하는 경우도 심심지 않게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기업들에게 ESG에 대한 빠른 인식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기존 준법 리스크 차원을 넘어 ESG 자체가 리스크 관리 대상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윤 변호사는 3층 건물로 비유했다. 1층이 환경법, 공정거래법, 노동법과 같은 국내 법령이라면, 2층은 앞서 언급한 EU와 미국 등 외국 법령과 국제 규범, 3층은 국제사회가 지향하는 새로운 가치와 공시 기준 등의 기타 연성 규범이라는 것이다.
윤 변호사는 “이제는 다른 나라 법령 혹은 연성 규범이라고 해서 지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ESG는 이해관계자와 기업간 법률적, 계약적 사안까지 포괄하는 것을 전제로 한 사적 자율 규제로 옮겨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윤 변호사는 이러한 환경 변화에 대응해 나가고 있는 국내 상황과 기업들의 변화상을 언급하는 한편 최근 논란이 된 ‘그린워싱’ 사례를 통해 규제에 세심하게 대응할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윤 변호사가 언급한 첫 사례는 국내 한 기업에서 자사가 생산하는 윤활유에 ‘탄소중립을 위한 친환경 제품’이라는 홍보 문구를 사용해 문제가 된 경우다. 당시 이 기업은 윤활유를 제조할 때 발생하는 탄소량에 상응하는 배출권을 구매해 이를 상쇄시키는 방식을 썼다. 이러한 내용은 홍보물에도 병기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시민단체 등은 탄소배출권 구매와 별개로 이런 방식의 홍보 문구가 소비자의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고, 이를 받아들인 공정위와 환경부로부터 ‘문구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과 함께 행정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윤 변호사는 “법 전문가로서 기업의 논리는 말이 되는 얘기”라며 “행정지도 수준으로 끝났지만, 이런 결과에 대해 한국 기업들은 깜짝 놀라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기업들로서는 탄소배출권을 구매해 탄소배출 상쇄했다는 개념을 적용한 탄소중립 실현 방식의 한계를 경험한 셈이다.
이어 이날 심포지움은 김서룡 법무법인 미션 변호사의 ‘글로벌 탄소중립 동향과 스타트업’ 발표와 카메룬 출신으로 스타트업 ‘에코링크스(Eco-Links)’를 창업한 존슨 펜(Johnson Penn) 대표의 사례 발표, 스탠포드 생명공학과(STANFIRD BIOENGINEERING)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IRIS HUI 씨의 ‘(기업 기후행동 자원 안내서(Corporate Climate Action A Guide to Resources)’ 주제 발표가 진행돼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어진 마지막 세션은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대표 변호사가 모더레이터를 맡아 남보현 HG INITIATIVE 대표, 박재주 SESU 대표, 서동은 리플라 대표, 박광민 AENTS 대표, 조윤민 소풍벤처스 파트너 등이 패널로 참석한 스타트업 토크가 진행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