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역사를 뒤바꾼 역대 기술들이 있다. 1948년 생모리츠 올림픽에서 처음 등장한 ‘전자계측’ 기술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부터 인간 심판 대신 기계가 선수의 결승 통과 시간을 알려주면서, 심판이 리본을 들고 결승선에 서있는 일은 사라졌다. 1964년 인스부르크 올림픽에서는 시청자가 스포츠를 즐기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중계 화면에 선수들의 기록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기술’이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수영 종목에 ‘전자식 터치패드’가 등장하면서 또 한 번의 혁신이 일어났다. 심판이 아닌, 선수가 직접 시간을 멈춰 기록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미 보편화된 ‘VAR(비디오 판독 기술)’도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처음 도입되어 판정 정확도를 한층 높였다. 이처럼 스포츠 역사는 수많은 기술과 함께 발전해왔다.
앞으로 스포츠 역사를 뒤흔들 기술은 무엇일까? 바로 인공지능(AI)이다. AI 기술은 감독, 선수, 심판, 중계진, 팬덤은 물론, 테크기업, 광고계 등 스포츠 생태계 전반에서 활약하고 있다. 스포츠 산업이 AI로 어떻게 디지털 변신을 꾀하고 있는지, 실제 어떻게 스포츠 경험을 향상시키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동안 스포츠 산업에 다양한 신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늘 있어왔다. 하지만 2022년 오픈AI의 챗GPT가 출시된 후, 여느 산업처럼 스포츠산업에서도 AI의 활용 시도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스포츠 산업은 진정한 ‘스포츠테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AI 기술은 스포츠 산업의 전 영역에서 활용되면서, 감독의 전략, 선수의 경기력, 관중 경험, 심지어 평가방식까지도 뒤바꾸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토마스 바흐 위원장은 “올림픽 역사상,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AI가 주목받을 것입니다.”라고 발표한 바, 실제 올림픽에서 AI 활용 사례를 180건 이상 선보이며 AI를 통한 스포츠 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글로벌 리서치 기업, 얼라이드 마켓 리서치(Allied Market Research)에 따르면, 스포츠 분야에서 글로벌 AI 시장은 2023년부터 연평균 30.1%씩 성장해 2032년에는 297억 달러(약 41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스포츠 산업에서의 글로벌 AI 시장 규모
AI는 선수발굴부터, 전략 및 전술 결정, 경기력 향상, 판정과 중계, 팬들의 스포츠 경험까지 전 영역에 걸쳐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각 영역별 AI 활용 사례를 살펴보자.
이제 감독의 직감과 경험만이 아닌,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의사결정으로 승부가 갈리는 시대다. AI는 뛰어난 선수를 발굴하고 배치하는 것부터 경기 전반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것까지 감독의 역할을 지원하고 있다.
스페인 프로축구 구단인 세비야FC는 그동안 엄청난 양의 스카우팅 보고 서류들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20~25명으로 구성된 스카우트 팀은 매일 선수의 훈련과 경기를 관찰하면서 데이터를 기록하는데, 한 선수당 40여개의 보고서가 나오고 이를 검토하는 데만 200~300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세비야 FC는 영입방식을 혁신하고자, 글로벌 IT사 IBM과 함께 생성형 AI 스카우팅 시스템인 ‘스카우트 어드바이저(Scount Advisor)’를 개발했다. AI는 득점시도, 패스 성공률, 속도와 같은 정량적 데이터는 물론, 선수의 태도, 팀 철학과의 일치여부 등 정성적 데이터까지 모두 분석하여 유망주를 식별한다. 특히 자연어 처리와 대규모 언어모델(LLM)을 사용해 선수 식별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예를 들어, 스카우터가 “드리블 능력이 뛰어난 측면 공격수(윙어, Winger)를 찾아줘.” 라고 원하는 선수의 특징을 검색하면, AI가 관련된 선수 목록을 생성하고 각 선수에 대한 스카우팅 보고서까지 요약해준다. 세비야 FC 디렉터 빅토르 오르타(Victor Orta)는 “우리는 절대 데이터만으로 선수를 영입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영입할 일도 없을 것이다.”라며 인간과 AI 분석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드리블 능력이 뛰어난 측면 공격수' 입력 시, AI가 선별한 선수 리스트
AI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모바일 폰 하나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스포츠 유망주를 발견할 수 있게 됐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과 인텔(Intel)이 공동 개발한 AI 기반의 ‘스카우팅 앱’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용자가 휴대폰이나 태블릿으로 달리기, 점프, 팔굽혀펴기 등 운동 동작을 수행한 영상을 앱에 업로드하면, 이 영상은 클라우드로 전송되고, AI가 운동 능력을 분석해 올림픽 선수가 될 잠재력 있는 유망주를 가려낸다. 이 기술은 2026년 청소년 올림픽이 개최되는 세네갈에서 지난 3월에 시범 도입되어, 세네갈 청소년 1000여명 중에서 48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앞으로 세네갈 국가올림픽위원회가 운영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할 예정이다. IOC와 인텔은 이 기술을 통해 외딴 지역에서도 재능 있는 인재를 쉽게 발굴 및 육성할 수 있고, 아이들도 꿈을 실현할 기회를 얻음으로써 스포츠 접근성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스포츠 인재를 발굴하는 인텔의 '스카우팅 앱'
AI 기술은 마치 코치처럼 선수의 훈련방식이나 영양섭취를 최적화하는 것부터 부상 예방, 맞춤형 스포츠웨어 제작 및 장비 개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퍼포먼스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사상 최초로 한국 양궁 대표팀은 5종목 모두 석권했다. 한국 양궁이 강한 것은 공정한 선발, 훈련비용 지원 등 여러 비결이 있지만 AI 기술을 활용한 훈련도 메달 획득을 도왔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로봇팔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AI 슈팅로봇’은 바람 세기와 방향, 화살 점수 분포를 감지해 조준점을 스스로 조정하면서 활을 쏜다. 로봇의 적중률은 평균 9.65점 이상으로, 선수들은 훈련 파트너가 부재하더라도 로봇과 일대일로 겨루면서 실전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극도의 압박감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능력도 양궁 종목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미세한 흔들림 없이 활시위를 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 훈련용 슈팅 로봇'과 '비전 기반 심박수 측정장치'
2020 도쿄올림픽에서 심박수가 160BPM 이상 치솟던 김제덕 선수,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60~90BPM으로 휴식 상태의 심박수를 유지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AI 기반의 심박수 측정 장치가 마인드 컨트롤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다. 이 장치는 선수에게 센서를 부착하지 않고, 미세하게 변하는 얼굴색을 카메라로 감지하여 심박수를 측정한다. 심박수는 실시간으로 화면에 표시되기 때문에, 선수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긴장상태를 파악할 수 있고, 누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개인별 맞춤 훈련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