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을 찾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의 수는 3만명(2022년 기준 3만300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새터민 혹은 통일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의 남한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줄곧 남한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부족한 정보력, 인적 네트워크 등 극복해야 하는 차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에는 창업이라는 바다에 뛰어들어 새로운 기회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북한 출신 창업가들을 지원하는 아산나눔재단의 포용적 창업지원 프로그램 ‘아산상회’를 통해 ‘성공’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3인을 만났다. ‘아산상회에서 만난 사람’ 시리즈의 마지막 세 번째 주인공은 10대 시절 가족과 생이별까지 경험하며 북한을 탈출한 강은혜 포레거시 대표다. 재탈북을 통해 남한에서 다시 조우한 할머니는 5년 전 돌아가셨다. 간호사의 삶을 살던 강 대표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며 ‘온라인 추모관’을 비즈니스 모델로 창업에 나섰다.
올해는 1차 베이비붐(1955년~1963년) 세대가 모두 60대에 진입했다. 10여년 후 이어질 2차 베이비붐 세대까지 고려하면 전체 인구 중 1600만명 가량이 60대 이상이 되는 고령화 사회가 예측되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민국에 ‘메가데스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되는 것인 장례 방식의 변화다. 장례 업계에 따르면 이미 우리나라 국토의 1%가 묘지화 돼 있다. 현재도 매년 여의도의 1.2배에 달하는 땅이 묘지가 되는 상황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 사망하기 시작하는 10여년 후면 묘지화의 진행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전망이다. 물론 그 사이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는 변화가 있기는 했다.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매장이 일반적이 었던 장례 방식은 화장으로 대체됐다. 수목장을 비롯해 다양한 장례 방식도 도입됐다.
하지만 이 역시 일정 부분의 땅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이에 정부에서는 올해부터 오는 2027년까지 추진하는 ‘제3차 장사시설 수급 종합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화장한 고인의 유골을 산·바다 또는 특정 장소 등에 뿌리는 장사방식인 ‘산분장’의 제도화·활성화로 친자연적 장례 문화를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산분장이 이전의 방식과 확연이 다른 것은 산분 구역에 비석과 같은 특정 표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적용될 경우 고인을 추모할 물리적인 ‘공간’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물론 이에 따른 대책도 있다. 앞서 언급된 정부의 계획에는 별도의 헌화 공간이나 온라인 추모관 등을 고도화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
강은혜 대표가 창업한 ‘포레거시’는 사명과 동일한 앱 서비스로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 디지털 휴먼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고도화된 온라인 추모 공간이다. 창업을 하게 된 배경에는 앞서 언급된 정책적인 변화가 요인으로 작용했다. 거기에 탈북민 출신으로 13세에 남한으로 온 강 대표가 그 이상의 시간들을 살아오며 겪은 경험이 반영됐다.
디지털 휴먼으로나마 만나는 할머니 모습
포레거시는 탈북민 창업가를 육성하는 아산나눔재단의 프로그램 ‘아산상회’의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기틀을 다졌다. 지난달 진행된 ‘아산상회 5기 데모데이’에서 IR 발표에 나선 강 대표는 포레거시 앱에 포함된 기능 중 ‘종이비행기’를 선보였다. 돌아가신 고인을 디지털 휴먼으로 복원해 움직이는 영상으로 메시지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강 대표는 이 기능을 통해 5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이하 할머니)를 디지털 휴먼으로 복원해 선보였다. 디지털 휴먼으로 등장한 할머니는 생전 모습과 목소리로 손녀에게 “우리 손녀, 발표 잘 하고 있니? 많이 떨리지?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라는 응원의 말을 건넸다. 열띤 데모데이 현장이 잠시 숙연해 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강 대표는 잠시 목이 메이는 듯했지만, 이내 “제가 가장 듣고 싶은 저희 할머니의 응원 영상이었다”며 씩씩하게 발표를 이어갔다.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난 날 역시 밝고 씩씩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강 대표는 “아산상회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딱 한 달 전인 지난 3월에 시작된 아이디어로 아산상회 프로그램을 거쳐 지난 9월 포레거시를 설립했다”며 천천히 창업 배경을 설명했다.
“원래 대학 시절부터 창업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예 일을 그만 두고 집중하게 된 계기는 예전에 TV를 통해서 본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이후였어요. VR 기기를 쓰고 가상의 공간에서 세상을 떠난 부모님, 자녀를 디지털 기술로 복원해 만날 수 있게 하는 내용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마침 앱 개발을 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함께 해보자고 했고 그것이 ‘포레거시’ 창업으로 이어졌던 거예요.”
채 반년도 지나지 않은 창업 당시를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새로웠다. 강 대표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려운 것을 꼽기 보다 쉬운 것을 말하기가 더 쉬울 정도로 막막했던” 과정이었다. 앱을 개발하는 과정도 쉽진 않았지만, 막상 초기 버전의 앱을 개발하고 제휴나 투자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 설명하는 것은 더 쉽지 않았다. 더구나 ‘고인을 추모한다’는 비즈니스 모델의 특성상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아픔이 있는 개인들을 대상으로 이를 알리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결국 시행 착오 끝에 ‘포레거시’ 서비스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B2C 모델과 더불어 추모관 등 장례 기업을 대상으로 한 B2B 모델을 병행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직까지 추모공원 중심의 장례문화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산분장 방식이 보급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예요. 그래서 우선은 장례 기업을 대상으로 유족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에 포함시키는 방식을 협의 중이예요. 기업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습니다. 기존에 서비스 되던 ‘사이버 추모관’ 등의 온라인 추모 공간은 사실 사진이나 영상이 형식적으로 소개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그에 비해 저희는 AI 기술을 적용한 디지털 휴먼 서비스를 비롯해 종교에 따라 온라인 공동 추모 예배를 진행하는 서비스 등도 계획하고 있죠. 그 외에도 유족들을 위한 다양한 기능들을 추가할 예정이예요.”
어린 시절 떠나온 북한,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순간들
할머니의 죽음 외에도 강 대표는 탈북 과정에서 또 남한에 살면서도 가족 및 지인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런 강 대표에게 삶과 죽음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는 비단 강 대표 뿐 아닌 생사를 넘나드는 탈북 이후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연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통해 들은 바로는 탈북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다고 해요. 또 탈북 이후 북한에 계신 부모님을 데려오려 하다가 다시 송환되거나 적발 돼 감옥에서 돌아사긴 분들도 많다고 하고요. 제 주위에도 아버지를 북에 두고 홀로 탈북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의지처가 없이 외로움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인 분이 계세요. 저 역시 여덟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너 탈북을 했는데, 그 이후부터 죽음은 저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강 대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여덟 살 무렵 어머니를 비롯해 외조부모와 북한을 떠났다. 이후 중국에서 5년 간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고 강 대표는 조부모에 의지해 지냈다. 그런 삶에 변화가 닥친 것은 조부모가 공안에 적발돼 북송이 되면서부터였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어머니가 다시 할머니를 모시고 강 대표에게 돌아왔지만 남한으로 오는 길에 다시금 어머니와 할머니가 북송되는 아픔을 겪었다. 다행히 강 대표는 어머니가 미리 준비한 위조 신분증 덕분에 홀로 남겨졌다. 당시 가족이 의탁했던 중국인 초등학교 선생과 친척 어르신이 있어 의지를 했지만, 어머니와 할머니가 붙잡혀 간 이후 3년은 그녀에게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고 한다.
“저는 먼저 남한으로 간 이모가 오셔서 남한으로 올 수 있었어요.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시 뵌 것은 3년이 지나 재탈북에 성공한 두분이 남한에 왔을 때였죠. 할머니는 그렇게 남한에서 5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어요.”
남한에서 살아가며 강 대표는 탈북민이라는 자신의 사연을 지인과 친구들에게 거의 털어 놓지 않았다. 다른 탈북민 친구가 차별 당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렇게 적응을 해가며 간호사의 꿈을 키웠고 결국 대학에 진학에 꿈을 실현시켰다. 강 대표는 “간호사를 희망한 것은 어린시절부터 아픈 가족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지난 이야기를 털어 놨다.
“할아버지께서 남한 출신이셨어요. 전라북도 전주가 고향이셨죠. 그로 인해 북한에 살면서 가족들이 차별을 많이 받았어요. 당에서 정해 준 지역에 살면서 가족들 모두가 탄광에서 근무하며 지냈어요. 할아버지는 폭발 사고로 탈북 이전부터 눈이 안보이시는 상태였고, 이모도 다리를 다쳤고, 어머니도 사고로 손에 장애를 가지고 계세요. 그리고 늘 배가 고팠죠. 북한을 탈출한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런 상황을 겪으며 어릴 때부터 가족들을 치료해주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꿈이었던 간호사를 뒤로하고 택한 창업, 탈북민들에게 도움 되고 싶어
2년간의 간호사 생활을 뒤로 하고 창업을 선택한 것에 대해 강 대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창업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다. 그런 생각은 어머니의 삶을 보며 더욱 강한 확신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원래 꿈도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예요. 남한에 와서는 북한 전통 요리 연구를 하셨어요. 치과에서 간호 업무를 보기도 하셨고요. 지금은 유튜버로 활동하고 계시죠. 저를 스물 한 살 때 낳으셨으니 이제 막 50세가 되신 터라 여전히 젊게 사세요(웃음). 하고 싶은 것은 다 하시는 성격이라 보디빌딩을 하시기도 했죠. 전 사실 좀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도전하는 삶의 태도를 본받게 되는 것 같아요. 창업을 했으니 이제 제가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지인들도 알게 되겠죠. 그래도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탈북 과정을 거치고 남한에 살면서 정체성에 혼란이 생겼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저도 곧 30세에 접어드니까요. 돌이켜 보면 남한에 살며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받아왔다고 생각해요.”
강 대표와 포레거시 팀은 아산상회 프로그램을 마친 후 새로운 배치 프로그램에 돌입해 기술 고도화를 진행하고 있다. 창업 초기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는 조바심 대신 이제는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속도 조절을 해 내실을 기하겠다는 생각이다. 그 계획 중에는 포레거시의 기능을 확장시켜 디지털 추모관을 넘어 디지털 유산 관리까지 가능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인터뷰 말미, 강 대표는 “포레거시의 기술을 통해 남겨진 가족들이 고인을 기억하며 살아갈 희망을 얻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저희 세대부터는 온라인 상의 활동이 이전 세대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아졌잖아요. 앞으로는 오프라인 보다 온라인에 남아 있는 개인의 데이터가 더 많아질 거라고 하고요. 그런 환경에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온라인 상에 사진이나 영상, 글과 같은 개인을 기록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기능은 아직까지 없다고 알고 있어요. 이것 역시 고인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반영해 기록하고 보전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특히 북한에 연고가 있는 탈북민들의 경우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북한 가족들이 남한에서의 삶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저희 할머니도 통일이 되면 남겨진 이모들과 꼭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죠. 통일이라는 꿈이 당장 이뤄지긴 어려워도 언젠가는 기술을 통해 할머니의 모습을 북한 가족들에게 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