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을 찾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의 수는 3만명(2022년 기준 3만300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새터민 혹은 통일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의 남한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줄곧 남한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부족한 정보력, 인적 네트워크 등 극복해야 하는 차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에는 창업이라는 바다에 뛰어들어 새로운 기회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북한 출신 창업가들을 지원하는 아산나눔재단의 포용적 창업지원 프로그램 ‘아산상회’를 통해 ‘성공’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3인을 만났다. ‘아산상회에서 만난 사람’ 첫 시리즈의 주인공은 남한 정착 이후 연이은 창업 경험을 바탕으로 태백 삼수령목장에서 6차산업화 비즈니스 모델로 새로운 기회를 열어가고 있는 박요셉 무무공간 대표다.
어린시절 북한의 광산 마을에서 자란 박요셉 무무공간 대표에게 태백 삼수령은 2006년 그가 이름을 ‘요셉’으로 개명하고 청소년 캠프 스탭으로 활동할 때부터 고향과도 같은 친근함을 줬다. 그렇게 시작된 삼수령과의 인연은 그가 건국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할 당시에도, 10여년 간 연쇄적인 창업을 통해 남한 사회에서 성공을 목표로 내달렸을 당시에도 이어졌다. 삼수령을 설명하던 박 대표는 “늘 제게 위안과 경이를 안겨주는 공간이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가 첫 방문을 하기 이전 삼수령목장의 역사는 1965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성공회 소속의 루벤 아처 토레이 3세(한국명 대천덕) 신부가 한국 청년 10명과 함께 건립한 초교파영성수도원 ‘예수원’이 바탕이 됐다. 삼수령 목장은 1975년 예수원에 의해 설립됐다. 이후 이곳에서 영면에 든 아버지를 이은 아들 벤 토레이(한국명 대영복) 신부는 미국 기독교 분파인 동방교회 소속 신부로서 아내인 리즈 토레이와 함께 2005년부터 예수원을 기반으로 삼수령목장과 공동체 마을을 운영해 왔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예수원은 현재는 통일 이후를 준비하는 세대를 육성하는 ‘네 번째 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남한에 연고가 없는 박 대표에게 벤 신부와 그의 아내 리즈는 부모님과 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꿈 이루기 위해 떠난 고향…우여곡절 끝에 남한에 이르기까지
박요셉 대표가 북한을 떠난 것은 1999년, 열 아홉살 무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런 성향은 이른 나이부터 북한의 장마당을 무대로 송이버섯, 의류 사업을 시작할 정도로 대담했다. 하지만 일찌감치 사업의 맛을 본 그가 꿈을 펼치기에 북한의 여건은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북한을 떠난 그가 향한 곳은 중국이었다.
“바로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가족들이 다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서 우선은 중국에 머물며 위장 신분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양치기 목동으로 일하기도 했고, 이후 3년 정도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의 호텔에서 매니저로 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위장 신분으로 중국에서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급기야 잠을 잘 때도 공안에게 발각될 것을 염려해 신발을 벗지 못하고 잠자리에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안한 나날들이 이어지며 건강까지 나빠지는 상황에서 결국 그는 홀로 동남아 루트를 따라 탈출을 감행했고 1년여의 긴 여정 끝에 2004년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기대와 달랐던 우여곡절의 한국 정착기, 외국인 커뮤니티를 통해 위안 얻어
사선을 넘어 도착한 한국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당시를 떠올리던 박 대표는 “같은 민족이니 중국보다는 더 적응하기 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언어부터가 문제였어요. 남과 북이 분단된 채로 지낸 기간이 70년이 넘으니 언어는 물론 문화도 많이 달랐죠. 솔직히 남한 사회에서 ‘차별’을 심하게 느꼈어요.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고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제가 택한 것은 한국 사람 대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인 커뮤니티와 교류하는 것이었어요. 벤 토레이 신부님도 그 중 한 분이셨죠.”
한국에 정착하며 그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고, 건국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목동 경험을 살려보자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이후 예수원 삼수령목장과 인연이 닿았을 때도 도움이 됐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ABC’도 모르는 상태로 영어 원서로 진행되는 수의학과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미국 드라마를 보고 팝송을 듣고 영어책만을 붙잡고 시간을 보냈다. 인연을 맺은 외국인 커뮤니티와의 교류도 실력을 쌓는데 도움이 됐다. 그렇게 7년만에 그는 졸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졸업을 한 그가 선택한 길은 창업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열심히 봤던 책들이 사회적 기업을 주제로 한 것들이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창업을 통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벤 신부님께서 졸업 후 삼수령목장에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지만, 우선 꿈꿔온 창업을 해보고 싶다면서 보류했죠.”
이어진 창업 도전, 실패도 적지 않았지만 얻은 것도 많아
박 대표가 꿈꿔온 첫 창업 아이템은 탈북민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었다. 그 스스로도 경험했던 한국 사회의 차별, 그로 인해 느끼는 고립감으로 탈북민들의 자살률은 보통의 경우보다 3배 가량 많은 상황이었다.
“창업을 하면서는 막상 큰 차별을 느끼지 못했어요. 주로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 교회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확보하려 노력했죠. 사실 전 북한에서 클 때부터 사회적인 네트워크 형성에 강한 사람이었고, 남한에서도 초반에 우울증과 적응 문제를 겪긴 했지만 그걸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어요. 특히 북한 문제에 연민을 느끼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강한 연대를 이어갔죠. ‘요셉’이라고 개명을 한 것도 그 때문이예요. 북한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성경에 나온 요셉과 같이 사람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죠.”
그렇게 그는 2013년 ‘제이협동조합 미디어 컴퍼니’를 시작으로 2014년 커피 프랜차이즈, 2017년 돼지농장 운영과 축산물유통을 바탕으로 한 ‘농업회사법인 요벨팜’, 2019년 공유주방 사업인 엠와이소셜프랜차이즈까지 연이어 창업에 도전했다. 어려운 순간에 직면할 때면 회사에 취직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던 순간도 있었지만 상황은 남한에 처음 왔을 때와 달랐다. 박 대표는 “포기하고 싶을 때면 제가 지치지 않도록 잡아 준 주변 분들이 많았다”며 말을 이어갔다.
“한국에서 20년을 살며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 같아요. 아산상회 역시도 1기 당시부터 제가 탈북민으로서 창업 경험이 많다는 사실 덕분에 자문을 요청해 참여하기도 했죠. 그렇게 아산상회 2기, 3기 자문역을 하면서 저 역시 지난 창업 과정을 돌이켜 볼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간에는 주먹구구식으로 창업을 했다면 앞으로는 엑셀러레이터 분들에게 전문적인 창업 코칭과 투자 유치를 받으면서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다섯 번째 도전, 마음의 고향인 삼수령에서 기회 찾아
그렇게 그는 아산상회 5기 멤버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창업 엑셀러레이팅 경험을 하게 된다. 초기 아이템은 산림 레포츠 키트를 아이템으로 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전국 캠핑장을 대상으로 방문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레포츠 키트를 개발·보급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간과한 것은 수요 예측이었다. 다수의 캠핑장이 영세한 규모로 운영되는 탓에 수익성을 기대할 만한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피보팅이 필요했고, 엑셀러레이터의 조언을 참고하는 과정에서 그가 떠올린 곳은 마음의 고향인 삼수령목장이었다.
“사업 아이템을 원점에서 검토하는 과정에서 레저 비즈니스의 엔진은 숙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하지만 돈도 없고 땅도 없는 상황이었죠. 엑셀러레이터님께 ‘말도 안된다’고 얘기하면서 사실 제 머릿속에 떠오른 곳은 삼수령목장이었어요. 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일출, 구름 위의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공간이 그림처럼 스쳐가더군요.”
결심을 하자 행동은 빨라졌다. 목장을 운영하는 예수원에 전화를 하고 미팅을 잡아 사업 계획을 설명했다. 마침 삼수령목장 역시 오랜 세월 1차 산업만을 이어오며 한계에 부딪혀 다른 방안이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박 대표가 제안한 것은 1차 산업인 목장에서 생산되는 우유와 한우 고기를 활용한 제조·가공의 2차 산업, 거기에 3차 산업인 숙박과 관광 비즈니스를 더한 6차산업화였다.
“삼수령목장에서 젖소와 한우 사육으로 생산되는 우유와 고기를 가공해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수려한 목장 공간에 캠핑장과 테마관광 프로그램을 적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어요. 거기에 저희는 여러 동물이 어울려 지구 환경을 보전하는 지속 가능한 농업 시스템, 즉 생태순환 프로세스를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죠. 이를테면 목장에서 방목되는 소들은 풀을 따라 이동을 해요. 그럼 남는 것은 소들이 배설한 분뇨죠. 여기에 구더기나 벌레가 끼면 닭을 풀어 놓습니다. 목초지에는 메뚜기도 엄청 많아 닭도 건강하게 키울 수 있죠. 그렇게 자연스레 퇴비화가 진행되고 다시 여기에는 풀이 자라납니다. 이런 생태순환 시스템은 삼수령목장테마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 콘텐츠로 제공할 수도 있죠.”
이렇게 삼수령목장테마공원이 활용할 수 있는 부지는 전체 15만평(약 495,867㎡) 중 8만5000평(약 280,000㎡)에 달한다. 박 대표의 제안을 수락한 삼수령목장은 치열한 논의 끝에 박 대표를 삼수령목장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라 판단했고, 신규법인인 ‘삼수령목장테마공원’의 공동대표로 임명했다. 그렇게 삼수령목장테마공원의 브랜드인 ‘무무공간(無無空間)’과 건강한 농산물을 구매하는 온라인 곳간 ‘무무곳간(無無庫間)’이 탄생했다.
그렇게 시작된 삼수령목장테마공원의 도전은 이미 성과가 나오고 있다. 최근 무무공간을 베이스로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진정한 지역 상생 모델 만들기’를 주제로 진행한 산림청 국민정책디자인 프로젝트가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수상한 것이다. 박 대표를 비롯해 시민, 공무원, 디자이너가 정책 제정 과정에 참여하는 ‘혁신적인 정책디자인’이라는 것이 수상의 이유였다.
물론 앞으로도 박요셉 대표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에서 남다른 자신감이 느껴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의 의지라면 어떤 문제든 최선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무무’는 소의 울음 소리에서 따온 이름이예요. 소비자들에게는 항생제와 농약 걱정 없는 농산물을 제공하고 목장을 찾는 분들에게는 천혜의 자연 속에서 오토캠핑장과 글램핑장, 카페, 레스토랑을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려 합니다. 지금은 목장과 함께 팜스테이를 운영하고 있고, 오토캠핑은 스노우캠핑을 원하는 분들에 한해 제공해드리고 있어요. 이미 산림청 국민정책 디자인단과 함께 필드 테스트를 통해 무무공간을 방문한 분들을 대상으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했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얼마전 목장에서 현대자동차 광고 촬영도 진행했어요. 촬영이 끝나고 스탭들이 참나무 장작 숯불에 한우를 구워 먹으며 하던 말이 생각나네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모든 것이 다 있는 공간’ 이라더군요(웃음). 그 말처럼 아무것도 없는 듯하지만 모든 것이 있는 공간이 바로 저희 ‘무무공간’입니다. 내년 봄이 되면 더 많은 서비스가 시작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