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준비하고 보면 이해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2023)는 보기에 다소 난해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난해한 분열적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들이 잇따라 나타난다.

이 전기 영화는 컬러로 된 하나의 흐름, 흑백으로 된 두 개의 개별 사건 흐름까지 총 3편으로 영화를 구성돼 있고, 이를 교차해 가며 보여주는 방식으로 보인다.

이런 구성은 다소 난해하고 복잡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전기 영화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어린시절부터 순차적으로 나가서 유년시절, 학창시절, 유럽 유학, 로스앨러모스의 핵폭탄 만들기, 일본에 핵투하···이후 중장년, 노년···...이런 식으로 만든다면 재미없을 것이다. 하다 못해 액자식으로 편집해서 들어갔다가 나오는 식이라도 돼야 할지 모른다.

놀란 감독의 이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개의 축은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유럽 유학 후 맨해튼 프로젝트 성공까지의 과정(컬러 촬영) ▲오펜하이머가 스파이로 몰려 고급 국가기밀 취급 인가 자격을 박탈당하는 청문회(흑백촬영), 그리고 ▲오펜하이머를 질투해 그 (불법적인)(불법적인) 청문회를 기획한 장본인으로서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55년 후 상무부 장관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루이스 스트로스란 인물의 이야기(흑백촬영)다.

놀란 감독은 이 세 부분을 정교하게 엮어가며 오펜하이머의 영광과 오욕적 시간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상영시간이 3시간이나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극히 자르고 잘랐겠지만 그래도 등장인물과 묘사할 이벤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핵폭탄 시험장은 많이 생략됐고 사실과 약간 달라 감안하고 봐야 할 부분도 있다. 폭발하는 순간의 모습도 부분적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이런 부분들은 미리 예상하면서 볼 때 좀 더 리얼하게 오펜하이머의 영광과 추락의 현장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 영화를 보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내용들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등을 바탕으로 살펴봤다. 잘 알려졌다시피 원전은 퓰리처상을 받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15)다. 그러나 역시 퓰리처 상 수상작인 리처드 로즈의 ‘원자폭탄 만들기’(The Making Of The Atomic Bomb·1986)와 ‘수소폭탄 만들기’(Dark Sun·2005)도 관련 내용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앨러머고도의 트리니티 테스트 그라운드 제로에 세워진 트러스형 철탑 위에서 핵 실험 전날 새벽 4시까지 폭탄을 설치하는 모습부터 묘사하면서 3주 후 일본에 핵폭탄 투하와 그 참상까지 기록한 ‘카운트다운 히로시마’(Shockwave·2005)도 있다.

오펜하이머가 당한 마녀사냥은 스파이는 아니지만 공산사상이나 공산주의자와 가까웠다는 점, 루이스 스트로스라는 비열한 인간형과 척을 진 점, 그리고 소련의 위협이 점증되고 있는 가운데 비인도주의적 대량 살상무기인 수소폭탄 개발 반대 입장에 섰던 점 때문이랄 수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지난해 12월 제니퍼 그랜홀름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편견과 불공정의 증거가 밝혀졌고 오펜하이머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확인해 스파이 혐의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앞으로 오펜하이머의 명예를 회복하는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마치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해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됐다가 359년 만인 1992년 복권된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생각나게 한다.  

1. 오펜하이머가 유럽으로 유학가서 쌓은 것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유니버설 픽처스)

영화 초반부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대 캐빈디시 연구소로 유학간 오펜하이머가 등장한다. 화학을 공부하다가 보니 자신이 원하는 게 물리학임을 깨달은 오피의 영국생활은 썩 매끄럽지 않았다.

실험에 젬병인 그는 블래킷 교수에게 혼나자 앙심을 품고 독사과를 남겨놓는다. 밤새 복잡한 머리로 터질 것 같던 그가 제정신을 찾고 블래킷 교수탁자 위의 사과를 처리하려 한다. 마침 그곳을 방문한 막스 보른이 먹으려던 사과를 빼앗아 휴지통에 넣는다. (그가 정신분열증을 앓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당시 물리학도들은 중세부터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 유럽을 방황했다. 오펜하이머가 처음 가려던 곳은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연구소장으로 있는 캐빈디시 연구소였지만 그가 거부해 전자를 발견한 조지프 톰슨 교수의 제자가 된다. 실험물리학에 젬병인 그는 막스 보른의 충고로 당시 물리학 중심지 유럽의 또 다른 축인 독일 괴팅겐대학으로 간다.

당시 괴팅겐대학에는 양자역학이란 말을 만든 주인공인 막스 보른이 물리학과 과장이었으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엔리코 페르니, 그리고 유진 위그너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폰 노이만도 같이 연구하고 있었고 에드워드 텔러는 나중에 조교직을 얻어 이곳에 나타났다.

당대 거물들과 교유하면서 오펜하이머의 학문적 업적도 쌓여갔다.

특히 괴팅겐대학에서의 그의 연구는 초기 양자 역할의 약한 기반을 확장하는 데 공헌했다. 그의 박사 논문은 ‘연속 스펙트럼의 양자 이론’에 관한 것이었으며 막스 보른은 탁월한 논문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1926~1929년까지 16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들은 그에게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국제적 명성을 얻게 했다. 그는 훨씬더 자신감 넘치는 젊은이가 돼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즐비한 노벨상 수상자들을 지휘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더 살았다면 받을 수도 있었겠다고 할 만큼 중요한 논문 다수가 새삼 꼽히고 있다. 여기에는 훗날 밝혀질 우주에서 별이 소멸된 후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이론을 밝힌 논문들도 포함된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2023년 7월 17일자는 오펜하이머 일대기를 다룬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아메리칸 센추리’를 저술한 데이비드 캐시디 미국 호프스트라대 화학과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캐시디 교수는 “그(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은 아니지만 블랙홀에 대해 노벨상을 받을 수준의 연구를 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1939년 별이 붕괴해 블랙홀을 만든다는 내용의 연구를 발표했다. 전쟁 발발로 잠시 잊혀졌지만 물리학자인 존 휠러가 1960년대에 다시 블랙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업적을 인정받았다. 캐시디 교수는 이 논문을 지적하면서 “1990년대가 돼서야 블랙홀에 대한 실험적인 증거가 나왔다”며 “오펜하이머 교수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20년대 양자 혁명의 주역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에르빈 슈뢰딩거, 폴 디랙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양자 혁명의 두 번째 물결을 이끌었다”며 “그가 박사 과정 때 발표한 ‘보른-오펜하이머 근사’는 양자 역학을 원자에서 분자로 확장·적용할 수 있는 근거로 많이 인용됐다”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당시 세계 물리학의 중심지인 유럽에서 배우고 단련한 20세기 최첨단 양자물리학을 미국으로 전파하는 전도사가 된다. 그러던 중 정부의 부름을 받아 핵폭탄 제작 비밀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된다. 뉴멕시코주에 있는 핵폭탄 연구 마을인 로스 앨러모스 총책임자는 글로브스였지만 핵심인 과학자들을 총괄하는 책임자는 오펜하이머였다.

2. 전세계 과학자들을 뒤흔든 핵분열의 원리

오스트리아의 리제 마이트너와 독일의 오토 한. 오토 한은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사진=위키피디아)

1938년 크리스마스 무렵,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을 벗어나 스웨덴에 거주중인 오스트리아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에게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7월까지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연구했던 독일 과학자 오토 한의 편지였다.

두사람은 우라늄 원자 핵에 중성자를 접촉시켰을 때 발생하는 원자핵을 조사하고 있었다.

당시 저명학자들은 모두 우라늄 원자핵이 중성자와 결합하면 더욱 무거운 원자, 이른 바 ‘초우라늄 원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상한 현상이 발견됐다.

오토 한의 실험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로 우라늄 원자의 거의 절반 밖에 안되는 무게를 가진 바륨원자가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됐다는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우라늄이 중성자를 흡수하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원자핵폭탄의 핵분열 폭발 원리의 첫단추를 꿴 것이었다.  

이는 당시 원자 물리학계의 중심 인물인 닐스 보어에게 전해졌다. 다음해 1939년 1월 미국 워싱턴 이론물리학 학술회의에 참석한 보어는 이 사실을 전격적으로 미국 물리학자들에게 알렸다. 네이처에 해당 논문이 게재되기 전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나치의 파시즘에 의해 연구의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유럽의 많은 과학자들이 망명해 있었다. 헝가리 물리학자 레오 실라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부탁해 루즈벨트 대통령 앞으로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넣기 전에 미국이 그것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청원서를 쓰고 아인슈타인에게 사인하도록 한 뒤 백악관으로 보내기에 이른다.

3. 미국은 어떻게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동을 걸었나

헝가리 출신 과학자 레오 실라드(왼쪽)는 1939년 아인슈타인에게 미국이 나치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청원서를 작성해 아인슈타인의 사인을 받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한다. (사진=위키피디아)

1939년 헝가리 출신 유대인 과학자 레오 실라드가 아인슈타인의 서명을 받아 백악관에 청원서를 넣었다. 나치가 핵폭탄을 만들 능력을 가졌으니 미국이 그보다 앞서 핵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무시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오토 프리슈와 파이얼스가 핵분열 원리를 이용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론으로 증명했다.  

미국은 반신반의하다가 독일 출신으로 영국시민이 된 영국 과학자 파이얼스의 논문을 읽은 미국 과학자 바네바 부시의 보고에 따라 1942년 8월 핵폭탄 개발의 시동을 건다.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덴마크 과학자 닐스 보어는 독일 제자 하이젠베르크로부터 나치 독일이 핵폭탄을 만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스승에게 심지어 조악한 원자로 설계까지 보어에게 보여줬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공부하던 그가 독일의 핵폭탄 개발 책임자가 됐다. 닐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와의 만남을 통해 독일에서 핵폭탄이 만들어질 가능성에 대해 듣고 놀라서 1943년 로스앨러모스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사실 소련도 영국 유학파 카피차란 과학자를 통해 1943년 이미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4. 알라모고도 트리니티 시험 현장 주변과 원폭 시험의 순간들

뉴멕시코 로스 앨러모스 연구단지 마을 남쪽에 있는 알라모고도 트리니티 핵폭탄 실험장 철탑에 원폭을 끌어 올려 탑재하는 모습. (사진=유니버설 픽처스)

원폭 시험장을 선정하고 준비하는 작업은 영화에서와 달리 하버드 실험 물리학자 베인 브리지가 담당했다. 그는 러더퍼드 밑에서 일했고 맨해튼 계획에 사용되는 하버드 사이클로트론을 만들었다. 그는 평탄하고 외떨어지며 날씨도 좋고 로스앨러모스에서 다니기에도 편리하면서도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충분히 먼 장소를 찾아 나섰다.

베인 브리지는 지도상에서 여덟 군데를 선정하고 답사한 끝에 로스 앨러모스에서 남쪽으로 210마일(약 337km) 떨어진 곳인 앨러모고도 폭격시험장 북서쪽 귀퉁이 장소를 찾았다.

육군은 인근 데이비드 맥도널드 목장을 빌려 야전 실험실과 헌병 사무실로 사용했다.

베인 브리지는 맥도널드 목장에서 서북쪽으로 3km 되는 지점을 ‘그라운드 제로’로 설정했다. 공병들이 이 중심점으로부터 대략 북쪽, 서쪽, 그리고 남쪽으로 1만야드(9km) 되는 지점에 콘크리트 지붕을 참나무 기둥으로 받치고 흙을 덮어 벙커 대피소를 만들었다.

세계 첫 원폭 시험장인 뉴멕시코 앨러모고도의 원폭 실험 코드명은 오펜하이머가 지었다는  ‘트리니티’다. 그 명칭은 어디서 왔을까. 그의 정부(情婦)인 진 태트록이 사랑한 영국 신부 시인 존 던(1572~1631)의 시들 가운데 하나인 홀리 소넷 14(Holy Sonnet14) 첫 구절(Batter my heart, three-person‘d God, for you...)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세 사람의 하나님(three-person‘d God)’이란 구절은 삼위일체(Trinity)를 말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성부, 성자(예수), 성신의 세 가지 다른 실체로 묘사한다. 헤밍웨이(1899~1961)도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쓴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1940)란 소설의 제목을 존 던이 지은 같은 제목의 시에서 따왔다.

트리니티 테스트를 위해 높이 30m의 철탑(그라운드 제로)가 세워졌다. 꼭대기에 설치된 2만달러 기중기로 원자폭탄을 끌어올렸다.  

철탑으로 이어진 고전압 충전지, 폭약 점화용 기폭기에 동시에 전원을 공급할 준비가 됐다. 하버드에서 스카우트되어 온 돈 호니그는 자신이 2년에 걸쳐 설계한 원폭의 방아쇠에 해당하는 장치인 X유닛이 잘 작동하길 바랐다. 이 5톤짜리 구체(원자폭탄) 주변으로 촘촘히 놓인 64개의 뇌관에 5500볼트의 전류를 동시에 흘려보내야 했다. 만일 X기관에 문제가 생기면 이 20억달러짜리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인류 최초의 원폭시험 당일인 1945년 7월16일 오전 5시 30분에 앞서 나빴던 일기는 잠잠해지고 현장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트리니티 테스트장이 있는 알라모고도. (사진=유니버설 픽처스)

호르나다 사막 상공 고도 8km 하늘에는 B29 2대가 비행하며 이 광경을 지켜봤다. 이 비행기에는 폭발시험장에서 원폭의 위력을 확인하고, 히로시마 원폭투하 폭격기 B-29의 에놀라 게이에도 올라가서 원폭 실험을 지켜볼 딕 파슨스가 타고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 지점에서 각각 남쪽, 서쪽, 북쪽으로 9km 떨어진 곳에서 원폭현장을 관찰할 현장 대피소가 마련됐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9km 떨어진 N-10000에는 기록장비와 탐조등이 설치됐다. W-10000에는 탐조등과 고속카메라가 설치됐다. S-10000 대피소는 시험통제소로 사용됐다.

베인브리지 팀은 사진촬영 외에도 폭발현상 연구, 기폭기 작동상태조사, 방사 화학적 측정 계획을 위한 여러 계기와 장치를 설치했다. 납판으로 만든 차폐막을 댄 두 대의 탱크도 육군으로부터 지원받았다. 폭발 후 그라운드 제로에 접근해 토양샘플을 채취하기 위해서다. 분열 파편물과 분열되지 않은 플루토늄의 성분비를 구하면 에너지 방출량을 구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9km 되는 곳에 통제실인 S-10000 대피소가 있었다. 여기에서 오펜하이머와 일행은 폭발 현장을 지켜보게 된다. S-10000 남쪽 9km 지점에 텐트와 바라크를 설치한 베이스캠프가 자리했다.

그라운드제로 북서쪽 32km 거리에 있는 콤파니아 언덕은 참관자들의 전망대로 이용됐다. 채드윅, 한스 베테, 파인만, 에드 텔러, 뉴욕타임스 로렌스기자, 그리고 영국의 스파이 과학자 푹스가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오펜하이머와 함께 있지 않았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고 호니그는 만일의 사태 발생 시 폭발을 중단시키기 위해 나이프 스위치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상 없었다. 카운트 다운후 엄청난 불빛이 반짝거렸다.

버섯구름은 12000m 상공까지 피어올랐고 폭발 후 섬광이 번쩍인 순간으로부터 100초 후에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트리니티 테스트장 베이스 캠프. (사진=위키피디아)
인류최초의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방사화학적 분석 결과 이 핵폭탄의 위력은 TNT 1만 8600톤에 해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1965년 한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핵폭발 시험이 성공하자 인도의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읊었다고 밝혔다.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

트리니티 시험이 진행되고 있을 때 쯤 샌프란시스코만에서는 우라늄 건식 핵폭탄인 리틀보이일부가 순양함 인디애나 폴리스호에 선적돼 거기서 9656km 떨어진 태평양 상의 미공군기지인 티니언 섬으로 가고 있었다. 거기서 이 핵폭탄 부품들이 조립돼 특별하게 만들어진 B29 폭격기에 실려 히로시마로 향할 것이었다.  

나치 독일이 1945년 5월 8일 이미 무조건 항복을 했으므로 핵폭탄의 타깃이 사라졌지만 그 타깃은 이제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에게는 1941년 12월 6일 진주만 공습을 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일견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버티는 일본군에 대한 원폭 투하 명분도 충분해 보였다.  

5. 맨해튼 계획에 영국 과학자들도 참여했다?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영국 과학자들. 윌리엄 페니(왼쪽부터), 오토 프리슈, 루돌프 파이얼스, 존 칵 크로포드가 메달을 받았다. (사진=오토믹 아카이브)

영화 속 트리니티 현장에 있던 과학자들 가운덴 영국 과학자들도 여러 명 있었다.  

배경엔 원래 영국이 미국보다 핵폭탄 이론 연구에서 앞섰다는 점이 있다. 핵폭탄의 중성자 연쇄반응을 계산해 핵폭탄 가능성을 확신시켜 준 결정적 두 명이 영국 과학자였다.

그중 한명인 오스트리아 출신 오토 프리슈는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로서 그녀와 함께 핵분열에 대한 최초의 이론적 설명(용어 생성)을 발전시켰고, 처음으로 핵분열 부산물을 실험적으로 감지했다. 그는 1940년 독일에서 이민 와 영국시민이 된 과학자 루돌프 파이얼스와 함께 원자 폭탄 폭발에 대한 최초의 이론적 메커니즘을 설계했다. 중성자 발견자인 제임스 채드윅이 미국에서 일하자고 권하면서 먼저 영국시민이 돼야 한다고 하자 흔쾌히 응했고 일주일 만에 영국 시민이 됐다.

영국은 혼자 튜브 얼로이(Tube Alloy)라는 비밀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비용문제로 미국과 협업하게 된다. 영국인들은 우라늄을 ‘튜브 얼로이’로 불렸다.

미국, 영국, 캐나다 3국 수장은 1943년 8월 캐나다 퀘벡에서 만나 함께 협력해 핵폭탄을 만들기로 했다. 튜브 얼로이 프로젝트는 자연스레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쳐졌다.

영국 과학자들은 이에 따라 자연스레 맨해튼 프로젝트에 가세했다. 영국 과학자팀 대표는 월러스 에이커스였다. 그는 가스 확산장벽 검토팀과 로스 앨러모스에서 폭탄 연구에 참여할 팀을 구성했다. 파이얼스는 폭탄연구팀을 이끌고 로스 앨러모스 마을로 온다. 두 사람 외에 1932년 2월 네이처에 중성자 발견을 발표한 채드윅, 그리고 영국으로 귀화한 독일 공산당 출신의 과학자 푹스 등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푹스는 미국의 핵폭탄 기밀을 러시아로 유출한 스파이였다.  

6. 플루토늄 원자탄을 만들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우라늄 원폭 리틀보이(위)와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플루토늄 원폭 팻맨. (사진=위키피디아)

원폭을 만드는 핵분열 연쇄반응 재료로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사용된다.

플루토늄은 우라늄보다 손쉽게 정제해 낼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스스로 분열하는 방사성 광물인 우라늄235는 자연 속에0.7%만 존재한다. 이를 농축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플루토늄은 페르미가 첫 시험에 성공한 흑연 원자로를 이용해 보다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우라늄을 사용할 경우 한쪽 끝에서 총처럼 쏴서 다른쪽 우라늄 코어를 폭발시키는 건(gun) 식이다. 플루토늄 원폭을 만들 경우 이 디자인 대신 좀더 어려운 설계를 요하는 이른바 내파(implosion)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트리니티 테스트에서 플루토늄을 사용했다.

그라운드 제로로 불리는 30m 높이의 트러스 철탑 꼭대기 지붕 아래에 있는 지름 약 2m 크기의 강철 구체가 바로 안에 있는 화약이 폭발하는 내파방식이었다. 구 표면 주위에 수많은 전선이 감겨 놓여져 있었다. 이 장치(Gadget)의 중심에는 고체 우라늄-238 실린더로 둘러싸인 약 6kg의 플루토늄 반구 두 개가 자리했다. 원자 연쇄 반응이 일어날 핵심부다. 폭탄의 나머지 부분은 재래식 폭발물로 채워졌다. 폭탄은 사방에서 들어오는 기폭용 전선을 사용해 정확히 동시에 폭발돼야 한다. 그러면 이 재래식 폭발은 노심의 플루토늄을 압축하고 임계 밀도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1000억 기압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핵분열이 일어나고 원자탄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히로시마에는 우라늄 코어 기반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나가사키에서는 플루토늄기반 폭탄 팻맨이 각각 투하된다.  

7. 그로브스 장군은 왜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 그런 증언을 했을까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왼쪽)과 오펜하이머. (사진=위키피디어 커먼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 보안 인가를 둘러싼 청문회 증언대에 선 그레이브스 장군은 “지금이라면 그에 대해 보안인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펜하이머를 눈엣가시로 여겨온 원자력위원회(AEC) 의장 스트로스가 기획하고 덫을 놓은 청문회의 검사측이 딱 듣고 싶은 그 답을 했다.

청문회에서 열내며 오펜하이머를 다그치는 검사는 당시 미국 연방검사보로 7년간 검사생활을 했던 인물로 사나운 반대 심문에 능한 공격적인 법정 변호사인 로저 롭이었다. 물론 그는 정치적 보수주의자였다.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에서는 스트로스가 그로브스를 협박해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만든 것으로 나온다. 아마도 군경력을 끝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오펜하이머는 이미 그 덫에 걸렸고 자칫하면 그로브스도 걸릴 참이었다.

8. 스트로스의 핵폭탄급 질투와 오펜하이머의 자기 변호

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왼쪽)와 그를 질투한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 (사진=유니버설 픽처스, 위키피디아)

오펜하이머는 부하나 아랫사람에겐 더없이 친절하고 자상하지만 동료에게는 예리했다고 한다. 스트로스는 어릴 때부터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전쟁 등으로 막혀 하지 못한  미련이 남는 성공한 은행가였다. 당연히 핵물리학 과학자로 대성한 오펜하이머가 부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핵폭탄의 아버지인 그가 대통령 핵 보좌관이자 원자력위원회(AEC) 의장인 자신을 공개리에 망신주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둘 사이에 결정적 균열이 생긴다.

특히 스트로스를 분노케 한 사건은  1949년 6월 원자력에너지 합동위원회 공개회의에서 일어났다. 안건은 미국이 방사능 동위원소를 외국 실험실에 연구목적으로 수출하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지였다. 이 회의에서 오직 스트로스만이 반대를 했는데 오펜하이머의 반박이 스트로스를 분노와 복수의 화신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오펜하이머는 “그 누구도 방사능 동위원소를 원자력 에너지를 얻는 데 절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자력 에너지를 얻으려면 삽도 필요하지요. 원자력 에너지를 얻으려면 맥주도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증언했다. 그건 “방사성 동위원소가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기에 이를 수출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한 스트로스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것이었다.  

이외에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가 고등연구소의 빈 교수 주택에 들어와 살겠다고 했을 때도 아를 교묘히 막았다. 오펜하이머는 이 연구소의 시어머니 역할을 하겠다는 그의 속셈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스트로스가 한 행사장에서 자식들을 오펜하이머에게 소개하려 할 때 그가 어깨너머로 악수해 모멸감을 준 일도 있다. 그 결과 영화에서 보이는 오펜하이머에게 최악의 반감을 가진 스트로스는 모짜르트를 시기질투한 샬리에르처럼 비친다..

또 한 사람의 시기질투에 눈먼 사람으로는 그로브스의 부관 니콜스가 있다. 그는 후일 원자력에너지위원회(AEC) 의장 스트로스에게 붙어 이 조직의 총괄매니저로서 오펜하이머를 위한 갖가지 공작에 동조한다.

이들은 특히 소련과의 연계 가능성을 집중 공격한다. 이른바 ‘슈발리에 사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오펜하이머 친구인 버클리대 불문과 교수 슈발리에가 공산주의자인 영국인 엘턴튼의 사주를 받고 오펜하이머에게 “핵 관련 기술을 소련 대사관과 공유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고 오펜하이머는 이 사실을 즉시 로스 앨러모스 보안담당자에게 신고했다. 그렇지만 친구(슈발리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였다. 이는 몇 년후 후일 국가기밀 보안취급 심사 청문회에서 그의 발목을 잡는다. 이와 연계된 인물들과 관련한 그의 과거 증언 내용과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오펜하이머는 청문회 이후까지 이어지는 스트로스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장 직을 유지한다. 연구소 교수들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9. 오펜하이머에 등장하는 주요 과학자의 면면은?

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사진=알프레드 크노프, 위키피디아)

▲오펜하이머=영화 오펜하이머는 그가 일생동안 얼마나 유명한 과학자들과 함께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유대인 과학자들이 많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933년 나치 독일은 비(非)아리아 계통의 공직자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반 유대주의 명령을 발표했다. 특히 유대인은 모두 아리아 계통이 아니었다. 대학교는 국가 기관이었으므로 교수들은 공직자에 속했다. 새로운 법률은 이미 노벨상을 받았거나 받게 될 11명을 포함해 독일 물리학자들의 4분의 1의 지위와 생계를 박탈해 버렸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총 1600명에 달하는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민을 떠나야 했다.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인슈타인과 더 나이많은 헝가리인들이었다. 반유대인법으로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약 100명의 저명한 유대계, 또는 유대계 가족을 둔  물리학자들이 미국으로 이민했다.

오펜하이머는 쟁쟁한 노벨상 수상자들을 지휘해 원폭을 만들었다. 그가 과연 어떤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이 영화만으로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원전 ‘아메리카 프로메테우스’에서는 그의 번뜩이는 재치와 말솜씨가 여러 행사에서의 일화로 소개되며 사람들은 그의 마법같은 언변과 설득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전한다.  

한마디로 순식간에 요지를 파악하고 본질로 직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같은 게 있었다고 한다. 이는 맨해튼 같은 고집스럽고 전문가이자 고집쟁이들인 과학자들을 한군데로 모으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아랫사람에게는 아주 친절하고 자상했지만 동료에게는 예리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한스 베테나 이시도르 라비처럼 동료이자 평생 친구도 있고, 그럭저럭 신뢰가 쌓인 그로브스 장군(청문회에서는 군 경력 단절 위협에 굴하긴 했지만)도 있고, 에드 텔러나 스트로스 같은 악연도 있다.

영화는 딜레마와 모순이 뒤섞여있는 한 천재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영화 초입에서 보여주는 찌직거리는 소리와 여러 분열적 장면은 핵분열의 표현일 수도 있고, 동시에 정신분열증세를 가진 천재의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례로 그는 핵 개발 과정에서 폭탄만들기에 집중하면서 일본인을 더많이 죽이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히로시마 참상이 밝혀지고 난 후 그의 모습은 또 다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트루먼을 만나러 가서는 “제손에 피가 있습니다”라고 말해 트루먼을 격분하게 만든다. 이런 모순적인 부분은 그의 인생 곳곳에서 나타나지만 놀란 감독은 이를 영화 초입부에서 이를 간명하게 요약해 보여주려 한 듯 하다.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는 것도 단 한발로 몇분만에 도시 하나를 없앨 수 있는 대량 살상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로스 앨러모스에서 원폭을 개발할 당시 핵보다 열핵폭탄을 개발을 하겠다던 에드 텔러가 연구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게 해 준다. 열핵폭탄, 즉 수소폭탄은 원자탄을 터뜨려 핵융합을 일으키는 수소폭탄이다. 핵폭탄이 있어야 열핵폭탄 제조가 가능해진다. 오피는 원폭 성공 이후에는 텔러의 열핵폭탄 개발에 대해 반대한다.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염증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어디까지나 핵개발 정보를 국제적으로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를 통해 관련한 국제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어찌보면 과학 천재의 너무도 순진한 정치적 의식이랄 수 있다. 그 스스로도 1940년대의 자신과 1950년대의 자신의 (공산당에 대한)사상이 달라졌다고 청문회에서 밝힌다.

하지만 소련이 변한 것은 알고 있음에도 핵개발에 대해 어디까지나 상호 공개적으로 하자는 그의 평화주의는 냉전 속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그는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마녀사냥식 반 공산주의 움직임을 만든 매카시 공화당 의원. (사진=위키피디아)

더구나 1950년대초(1951~1954)는 미소 냉전과 함께 미국 위스콘신주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의 이름을 딴 반공산주의 선동인 ‘매카시즘’이 횡행했다. 매카시는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적 연설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소 냉전 심화속에 중국의 공산화, 한반도의 6 ·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많은 미국민들이 그의 주장에 광범위하게 지지한다. 마녀사냥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즐비한 노벨상 수상자들을 지휘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더 살았다면 받을 수도 있었겠다고 할 만큼 중요한 논문 다수가 꼽힌다. 여기에는 훗날 밝혀질 우주에서 별이 소멸된 후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이론을 밝힌 중요한 논문들도 포함된다.

어네스트 러더퍼드 (사진=유니버설픽처)

▲어네스트 러더퍼드=오펜하이머가 처음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던 영국의 물리학자. 원래 뉴질랜드 출신이지만 당시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는 알파(α), 베타(β), 감마(γ) 선을 발견했다. 또 1903년에는 각종 방사선의 성질을 밝혀 원자 붕괴의 법칙을 확립했다. α입자 산란 실험으로 원자핵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1913년 ‘러더퍼드 원자 모형’을 제시해 닐스 보어가 원자구조 이론을 더 발전시켜 나갈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또 입자 충격으로 처음 원자를 인공적으로 파괴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미 1920년(채드윅의 중성자 이론 발표 12년전) 질량이 1이고 전하가 0인 원자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성입자에 대해 예언하기도 했다. 그는 “그것은 쉽게 원자의 구조속으로 들어가 핵과 결합하든지 또는 핵의 강한 전기장에 의해 붕괴될 것이다. 만일 이와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중성자, 그것은 원자핵을 조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으로써 러더퍼드는 중성자를 이용한 핵의 붕괴, 즉 핵폭탄의 기본원리를 말한 것이다.

닐스 보어.(사진=위키피디아)

▲닐스 보어=덴마크의 물리학자. 러더퍼드의 원자모델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그의 원자 모형은 원자 핵 주변을 도는 전자는 원자핵 주위의 안정적 궤도를 돌지만 한 에너지 궤도에서 다른 에너지 궤도(준위)로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에너지 단위입자(양자)가 하나의 준위에서 불연속적인 다른 준위로 정수배로 껑충뛰는 것을 양자도약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물리학과 함께 오펜하이머에게 미친 영향은 평화사상이었다. 보어도 훗날 50년대 냉전시대에도 여전히 자신의 평화사상을 전했고, 오펜하이머는 그에게 영향받은 이 사상을 끝까지 끌고 나간다. 그는 3주간 씩 세차례 로스 앨러모스를 방문했다. 그의 역할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실라르드. (사진=위키피디아)

▲실라르드=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그는 일찍이 1933년 영국에서 신호등을 건너다가 핵폭탄 연쇄반응의 원리를 생각해 낸 사람이다.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 이듬해다.) 즉, 중성자를 핵에 충돌시켜 중성자가 공급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처음으로 생각해 냈다. 그는 1934년 6월과 7월 제출한 특허 출원서 수정안에 ‘핵변환을 통한 전력생산과 다른 목적을 위한 핵 에너지 방출’이란 표현을 추가했다. 그는 최초로 중성자에 의한 연쇄반응을 제안했다. 그리고 임계질량이라고 알려지게 된 ‘연쇄 반응이 스스로 유지되는 데 필요한 반응물질의 체적’에 관한 중요한 특성들을 기술했다.

그는 특허 출원서 4쪽에 “만일 두께가 임계치보다 크면...나는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에 가서 이연구를 한다. 그의 특허는 1936년 영국정부의 기밀 사항이 됐다.

하지만 이 원자폭탄을 만들 연쇄반응을 연구할 비용도 없고 자원도 없었다. 그의 이론을 실현한 사람은 미국으로 망명 온 이탈리아 물리학의 교황 페르미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가 시카고대 미식축구장 풀밭을 지나 그 아래 지하 스쿼시 코트에 세워진 페르미의 흑연으로 둘러싸인 원자로 시설물을 보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실라르드는 페르미를 도와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든다. 사실 그는 로렌스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사이클로트론의 기초원리와 일반 설계를 그보다 적어도 3개월 앞서 완성했다. 그는 1929년 1월 5일 이 장치에 대해 특허출원했다.

영화에서 묘사된 페르미가 만든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 파일. (사진=유니버설 픽처스)
페르미. (사진=위키피디아)

▲페르미=핵폭탄 원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과학자들에 의해 최초로 알려졌다. 그역시 1941년 시카고대 축구장 지하 스쿼시코트 실험실에서 중성자로 우라늄을 때리고 핵분열을 확인한 과학자다. 또한 그는 우주에 존재하는 기본적 힘의 이해 영역을 확대했다. 그의 논문은 원거리에서 작용하는 중력과 전자기력, 그리고 핵의 크기 이내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원자핵을 단단히 결합시키는 강력 외에 새로운 종류의 힘인 ‘약력’을 도입했다. 그역시 유대인 부인과 함께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탈출해 온 천재 과학자다.

페르미의 친구들은 그가 물리학에 관한 한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여 그를 물리학의 ‘교황’으로 불렀다. 페르미는 1942년 12월 2일 시카고대 축구장 지하 스쿼시코트 아래 있는 공간에서 세계최초로 원자로를 만들어 작동에 성공한다. 이 원자로를 시카고 파일-1(Chicago Pile-1)이라고 부른다. 검은 사각형으로 된 원자로 외벽은 흑연이다. 우라늄을 때리는 중성자를 조절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 원자로는 0.5W에서 작동했기에 방사능 방호벽이나 냉각시스템이 필요없었다고 한다.  

버클리대의 어네스트 로렌스는 입자가속기를 만든 인물이다 (사진=위키피디아)

▲로렌스=영화 초반부에서 오펜하이머가 버클리대에 짐을 풀었을 때 어네스트 로렌스와 만난다. 옆방의 로렌스가 학생들과 작업하고 있던 것은 입자를 가속해 원자핵을 쪼개는 기계인 입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였다. 이는 입자를 회전시켜 에너지를 증가시킨 다음 새총의 돌처럼 목표물을 향해 던지는 기계였다. 이는 원자핵을 부수는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 장치였다. 그는 이 장치 발명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40년 12월 14일 글렌 시보그 버클리대 교수 팀은 우라늄238을 가지고 입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로 높은 에너지를 가진 플루토늄을 처음 분리해 냈다. 이로써 자신들의 실험 및 그 결과가 잠재적으로 군사적 응용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시보그 교수팀은 이어 맨해튼 계획에 따라 핵폭탄 연료를 만드는 시카고파일 팀에 합류한다. 이들은 원자로 없이 플루토늄을 만들 방법을 찾아냈다. 1942년 6월 17일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 대학의 4.5인치 사이클로트론은 40일 만에 300파운드의 플루토늄을 만들어 시카고의 맨해튼팀에 전했다.

태초의 입자라는 힉스입자를 개발한 스위스-이탈리아 국경의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의 입자가속기도 여기서부터 발전됐다. 하지만 로렌스는 이 장치 개발을 위해 부유한 기업가들의 후원을 받고 그들과 친하게 지낸다. 반면 오펜하이머는 교원노조 운동 등을 하며 두 사람은 보수와 진보로 갈리게 된다.

로렌스는 오펜하이머의 공산당 활동을 알고 있었지만(영화에선 칠판에 쓰인 글을 지우라고 한다)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면서 이견을 보인 것과 함께 그가 친구인 윌슨 톨먼과 아내 키티를 감쪽같이 속이고 톨먼 부인과 외도한 걸 알고는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영화 말미에서 로렌스는 복도에서 오펜하이머를 먼저 보고 도망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청문회에 녹음파일을 제출하고 배탈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소한의 배려였을까.

하이젠베르크 (사진=위키피디아)

▲하이젠베르크=독일 나치의 핵폭탄 책임자가 된 인물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한 독일 과학자다. 이는 그가 1927년 이탈리아 코모에서 열린 볼타 서거 100주년 기념 물리학회 기간중 생각해 낸 것이다. 미시 양자세계의 속성을 가장 잘 말해 주는 이론이다. 특정 시간에 원자내 입자의 특정 위치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1941년 닐스 보어에게 가서 독일이 연구중인 핵 장치를 보여주었다. 닐스보어는 미국으로 가서 이를 밝힌다. 아인슈타인은 “신들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이 양자 확률이론을 반대했다.

트리니티 시험 현장 부근에서 트리니티 테스트 핵폭발 광경을 보고 있는 에드워드 텔러. (사진=유니버설 픽처스)
울람과 함께 미국의 수소폭탄을 개발을 주도한 에드 텔러 (사진=위키피디아)

▲에드워드 텔러=헝가리 공산당에게 가족이 시달린 유대인 출신이다. 영화에서는 그가 핵융합연구에 골몰하며 핵폭탄 연구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그는 제멋대로였기에 오펜하이머는 한스 베테를 로스 앨러모스 연구단지 연구부장으로 앉혔다. 그는 히로시마 나카사키 원폭 투하 이후 계속해서 수소폭탄을 개발하자고 오펜하이머에게 제안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반대한다. 그는 1930년 라이프치히에서 하이젠베르크에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년간 연구원으로 있다가 괴팅겐 물리화학연구소로 옮겼다. 노벨상 수상자 유진 위그너에 따르면 “그의 초기 논문들은 모두 양자역학의 응용분야를 확장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세스 네더마이어=플루토늄 폭탄 제조과정에서 불순물 문제로 난관에 봉착했을 때 핵 코어를 폭약으로 임계상태까지 압축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해 플루토늄 폭탄을 완성시킬 수 있게 했다.

▲키샤코프스키=우크라이나 출신 화학자인 그는 원자폭판 팻맨의 폭약 렌즈를 제작하고 시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클라우스 푹스 (사진=위키피디아)

▲클라우스 푹스=독일 출신 영국 물리학자. 플루토늄 폭탄의 내파 기폭장치 개발에 핵심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핵심 기밀을 소련에 고스란히 넘겨준다. 영화에선 시험용 핵폭탄에 키샤코프스키와 함께 핵코어를 넣는 작업을 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리고 핵폭탄이 터지자 둔덕 뒤로 숨는 모습을 보이며 관객의 눈에도 두드러질 정도로 튀게 행동한다.

세계최초의 원자폭탄 시제품. 그라운드 제로 위 30m 높이의 철탑에 올려져 있다. (사진=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돈 호니그=내파식 핵폭탄에 전기를 동시에 배분하는 장치를 개발한 과학자. 30m 높이의 철탑 위에서 폭발 거의 직전까지 작업하고 오펜하이머가 있는 S-10000 대피소로 내려온다. 핵폭탄 격발 단추는 그의 친구가 맡았고, 그는 만일에 상태에 대비해 폭파실험을 중단시킬 수 있는 나이프 스위치를 맡았다.

폰 노이만. (사진=위키피디아)

▲폰 노이만=헝가리 출신 유대인 수학자. 텔러와 함께 플루토늄 원폭의 내파 원리를 알아내 오펜하이머에게 알려준 인물이다. 그는 세계의 천재 물리학자들이 모인 고등연구원 시절 특이하게도 연구원 지하에서 컴퓨터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는 알려졌다시피 대외적으로 알려진 세계 최초의 전기전자식 컴퓨터 에니악(ENIAC) 개발 지휘자다. 그는 오펜하이머와 정반대의 정치관을 갖고 있었다. 수소폭탄 개발을 강력히 지지했던 그였지만 오펜하이머가 슈퍼폭탄과 관련된 자신의 작업을 방해한 적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슈발리에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자, 노이만은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은 탈선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군요?”라고 재치있게 대답했다.  

아인슈타인의 1947년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아인슈타인=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임을 밝혀 뉴턴의 절대적인 기계적 우주론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는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이론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부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펜하워와는 이런 과학적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사이좋게 지냈다. 그는 나중에 오펜하이머가 원자력자문위 보안 인가 청문회에 나가게 된 것을 주위사람에게 대놓고 바보짓이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가 정부의 보안위원회에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뿐 아니라 그같은 유해한 과정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문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미국 정부말이네......해결책은 간단해. 오펜하이머는 워싱턴에 가서 정부 관료들에게 멍청이라고 말해주고 집에 가면 그뿐이지”라고 말했다.  

11. 오펜하이머 사건과 매카시 광풍은 독일 재앙의 반복

아인슈타인은 매카시 광풍이 휘몰아치던 1951년 미국의 분위기를 그의 친구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로 써 보냈다. 여기에는 “이곳 미국에서 수년 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라고 내용이 들어있었다.

오펜하이머 청문회가 시작된 1954년 매카시즘 선풍을 불러온 매카시 의원이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갔다고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후폭풍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오펜하이머는 청문회로 보안 인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의 명성에 걸맞게 나름대로 평화롭게 활동하다가 갔다.

하지만 과학자들과 진보적인 견해들을 막은 것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해 온 미국에는 드러나지 않는 큰 손실이었다.  

이재구 기자

jklee@tech42.co.kr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저작권자 © Tech42 - Tech Journalism by AI 테크42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IT근로자 가장한 북한해커 ‘외국기업 암호화폐’ 어떻게 훔쳤나?

북한해커들이 북한 정권을 위해 암호화폐를 훔쳐 나르고 있다. 북한 IT 근로자들은 가짜 신원을 만들어 전세계 수백개의 조직에 이미 침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채용 담당자와 벤처 캐피털리스트로 위장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상회의를 진행해 회의가 부적절하게 로드되도록 설계했다. 또한 미국에 있는 중개업체를 통해 회사에서 발급한 워크스테이션을 이용하고 수입을 처리하면서 북한에 적용되는 재정 제재를 피해갔다.

젠슨황 “엔비디아 가치 지속 상승”···3가지 이유

최소 2027년까지 엔비디아 성장세 전망과 예상 수치까지 나오고 있는 가운데 디코더가 정리한 젠슨황 CEO의 어닝콜 발언에 주목해 본다. S&P 마켓 인텔리전스가 전망한 오는 2027년까지의 엔비디아 매출, 영억이익, 순익 전망치, EPS 그래프도 함께 소개한다.

[DMI 2025] 박민성 데이터라이즈 CSO, 매출 성장을 위한 5가지 CRM 전략은?

대표 CRM채널 카카오 톡채널은 현재도 지속 성장 중, 효율을 중시하는 디지털 마케팅 전략 필요 고객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온사이트...

베스핀글로벌, ‘2025년 성공하는 스타트업의 업무 효율 극대화 전략’ 웨비나 개최

AI 매니지드 서비스 전문 기업 베스핀글로벌은 구글 클라우드, 전자서명 솔루션 기업 모두싸인과 함께 ‘2025년 성공하는 스타트업의 업무 효율 극대화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