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라디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는 매체로 각인돼 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떠오르는 것은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아닐까? 한때는 누구를 진행자로 기억하느냐에 따라 세대가 가늠되기도 했다.(이를 테면 80년대 진행자를 두고도 이수만, 서세원, 이문세로 세대가 나뉜다)
이 세대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차를 운전하며 듣는 방식으로 라디오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비주얼이 대세인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라디오가 만만치 않은 애청자를 바탕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에게 라디오는 주류 미디어가 아니다. 워크맨, CD플레이어 등 아날로그 기기가 주류를 이뤘던 시절에는 기본 옵션이 라디오였지만, 이제는 굳이 앱을 설치하는 수고로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라디오 듣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디오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점심시간 이야깃거리로 등장하는 경우도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MZ세대, 그 중에서도 1020세대인 Z세대의 대화 주제에 다시 라디오가 등장하고 있다. 라디오 세대였던 그들의 부모들은 반가운 마음에 자녀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런데 들어보니 익히 알고 이던 라디오와는 뭔가 다르다. 라디오는 라디오인데, 원하면 진행자가 될 수도 있고 그때 그때 진행자와 소통할 수도 있는 라디오, 바로 최근 오디오 콘텐츠의 화려한 진화를 선도하고 있는 ‘스푼라디오’ 이야기다.
스푼라디오가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2016년 무렵이다. 스마트폰 기반의 플랫폼 서비스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지면서 적은 데이터 사용만으로도 고음질 오디오 방송 청취가 가능한 라디오 플랫폼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이후 그 성장 가능성을 기반으로 꾸준한 투자 유치가 이뤄지며 현재는 영어권을 비롯한 아랍어권, 일본 등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스푼라디오 본사에서 만난 차승학 콘텐츠전략팀 리드는 “월 평균 글로벌 이용자가 200만명, 그 중 Z세대로 일컬어지는 1020세대가 80%”라며 글로벌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는 스푼라디오의 현황을 설명했다.
“해외 이용자 중 일본 이용자의 비율이 50%를 차지하고 있어요. 전체 이용자가 꾸준히 늘어가고 있지만, 그 중 일본의 이용자 증가세는 이미 한국을 능가할 정도죠. 이는 일본의 성우 중심 팬덤문화가 스푼라디오라는 플랫폼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에요. 크리에이터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거죠. 일례로 스푼라디오는 일본 TBS 공중파 라디오와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주인공 성우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협업해 만들기도 했어요.”
일본에서 스푼라디오가 팬덤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1020세대를 중심으로 한 소통 기반 놀이문화로 커가고 있다. 과거의 라디오, 그리고 현재까지 대부분의 오디오 플랫폼들이 일방적으로 방송이나 음악, 오디오북 등의 음원을 듣는 방식에 머물렀다면, 스푼라디오는 다른 길을 택했다. 생생한 라이브 방식으로 진행자와 유저들이 실시간 댓글로 소통하는 공간으로 차별화를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푼라디오는 누구나 진행자가 될 수 있는 열린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월라, 리디북스, 밀리의 서재 등의 오디오북 플랫폼이 등장하고 팟빵, 오디오클립 등의 서비스가 오디오 플랫폼이라는 범주에서 경쟁하고 있지만, 스푼라디오가 내세우는 차별성은 여전히 두드러진다. 이는 스푼라디오가 열린 플랫폼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고, 방송 진행자로 진입하는 DJ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등 지속적인 진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승학 리드가 이끄는 콘텐츠전략팀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스푼라디오의 주요 부서라 할 수 있다.
“최근 저희가 진행하는 프로세스는 OTT 서비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어요. 자체 제작팀을 꾸리고 셀럽이나 연예인을 섭외해 좀 더 유저들이 즐길 수 있고 재미있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또 이를 통해 일반 DJ 분들이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방향성, 참신한 시도 등을 제시하기도 하고요. 오디오를 기반으로 한 경쟁 서비스의 등장은 오히려 반가운 부분이에요. 시장의 규모가 커지는 것이니까요. 그에 따라 오디오 콘텐츠의 매력을 느끼고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도 더 늘어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현재는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서비스를 고민하고 제시해야 하니까요.”
차 리드는 “스푼라디오가 특정 세대를 타깃팅해서 서비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푼라디오라는 플래폼을 선택한 것”이라며 “Z세대 특유의 디지털 공간에서 관계 맺기 방식이 스푼과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스푼라디오를 찾는 유저들은 저마다 현실 공간의 자아와는 전혀 다른 자아로 스푼라디오의 유저, 혹은 진행자로 변신한다. 익명 기반의 닉네임으로 서로 부담없고 편하게 관심사나 취향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다. 모든 방송은 열려있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방송을 진행하는 DJ들은 들어오는 유저의 닉네임을 호명하며 ‘OO님 어서오세요’라는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에 반응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듣다가 그저 무심히 나와도 그만이다. 차 리드는 이를 “Z세대가 콘텐츠를 소비하고 즐기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Z세대가 스푼라디오를 선택한 이유는 그들만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즐기는 방식이 스푼라디오가 마련해 놓은 서비스 방식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에요. 이들은 방송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죠. 예를 들면 저희가 만드는 오리지널 콘텐츠 DJ도 현실에서는 그냥 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DJ가 됐을 때는 드라마 주인공을 성대모사하거나 고민을 상담해 주기도 해요. 오프라인에서의 자아와 온라인의 자아가 완전히 다른 거죠. 진행자에 도전하는 어린 친구들도 그걸 보고 학습하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스푼라디오 플랫폼에서 만들고 있고요. 이것이 스푼라디오의 재미난 특징이자 차별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아닐까 싶어요.”
놀라운 점은 스푼라디오가 구축한 생태계의 매력을 확인한 지상파 라디오 방송에서 협업을 제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푼라디오는 이 기회를 DJ들의 성장을 위해 공유하고 있다. 보수적인 기존 미디어가 인터넷 플랫폼 서비스 기반의 스푼라디오에 문을 열었다는 것은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MBC라디오와 협약을 맺어 비록 새벽 3~4시 시간 대이긴 하지만, 스푼라디오의 인기 DJ를 대상으로 MBC 지상파 라디오 방송 진행 경험을 제공하고 있어요. 그것이 그분들에게는 동기부여가 되더군요.”
이러한 역전 현상은 단순히 스푼라디오의 DJ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플랫폼으로서 연예인, 셀럽들이 Z세대들과 소통하기 위해 스푼라디오를 통해 DJ로 데뷔하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제대 후 스푼라디오 DJ로 복귀한 황광희는 물론 아이돌 그룹 ‘여자친구’ 해체 이후 걸그룹 ‘비비지’를 결성한 엄지가 스푼라디오 오리지널 콘텐츠 ‘엄지의 세포들’을 통해 라디오 DJ로 데뷔하기도 했다. 경계는 그렇게 사라지는 중이다.
스푼라디오의 DJ 시스템은 대략 3단계로 구분된다. 일반 DJ를 넘어 가능성을 보이는 DJ에게 ‘루키’라는 등급이 부여된다. 그 다음 ‘초이스’에 이어 전문적인 수준의 실력을 보유한 ‘파트너’가 가장 상위 등급이다. 유저들은 이들에게 부여된 등급을 통해 DJ의 실력을 가늠하고 때론 선택의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이들은 스푼라디오가 마련한 도네이션 모델을 기반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도 있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상담 등 필요한 지원이 빠르게 이뤄집니다. 또 DJ에게 최적화된 시그니처 스티커도 제공되죠. 그렇게 거래되는 아이템 거래액만 837억원 정도예요. 인기 있는 DJ 즉 파트너들 중에는 스푼라디오 DJ가 직업인 분들도 적지 않죠. 많게는 5억원에서 10억원 정도의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구조니까요.”
그렇다고 아프리카TV 등 다른 영상 기반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문제, 즉 수익에 목적을 둬 무리수를 두는 방송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스푼라디오가 스푸너 케어센터 등을 통해 지속적인 관리와 교육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Z세대 중심으로 스푼라디오 특유의 선한 문화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 리드는 “이렇게 선한 집단이 있을까”할 정도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어린 유저들이 많다 보니 저 역시도 처음 스푼라디오에 동참했을 때 우려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선정적이거나 폭력적 성향의 콘텐츠죠. 하지만 곧 청소년 보호와 신고에 대한 대응은 시스템적으로 잘 이뤄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내용이 방송에 언급되면 신고 정신도 투철해요(웃음). 또 혹여 그런 문제가 발생 시에는 강력한 패널티를 적용하고 있기도 하죠. 그래서 사실상 유해 콘텐츠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어요.”
차 리드에게 2021년은 ‘스푼라디오를 통해 놀라운 성과와 가능성’을 발견한 해였다. 향후에는 DJ 육성 및 지원 시스템을 더욱 강화해 스푼라디오와 DJ가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더욱 재미있는 오리지널 콘텐츠도 연이어 기획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차 리드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네이티브인 Z세대에게는 오디오 콘텐츠의 새로운 매력을 선보이고, 옛 추억을 기억하는 세대는 새로운 유저로 유도하는 전략을 구사할 계획”이라며 2022년의 전략을 설명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로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스푼라디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2022년에는 아마 올해보다 더욱 치열하고 정신없는 경쟁이 이어지겠죠. 이제까지 구축한 스푼라디오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더 재미있는 이벤트들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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