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호환..?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듯한데요. 프린터 토너를 생각해 보면 될 듯합니다. 보통 프린터 토너(또는 잉크)를 교체할 때가 되면 저렴하게 구매했던 본체 가격에 비해 너무 비싼 가격에 깜짝 놀랄 때가 많죠. 이럴 때 호환 제품을 삽니다. 공기청정기 역시 1년에 한 번은 필터를 교체해 주라는데, 이 비용이 만만치 않다 보니 이것도 호환 필터를 사게 되죠.
저는 필립스의 전동 칫솔을 쓰는데요. 얼마 전에 칫솔모 교환을 위해 검색해 보니 정품 칫솔모는 2만 원에 4개(배송비 5천 원 별도)인데 호환 제품은 8개에 8천 원(배송 포함)이더군요. 단순 계산을 해봐도 6배가량 차이가 납니다.
사실 언젠가부터 이런 호환 제품은 일상이 됐습니다. 월급만 빼고 다 오르잖아요. TV 리모컨도 고장 나거나 잃어버리면 삼성/LG 호환되는 만능 리모컨을 쓰고, 경우는 좀 다르지만 신라면이나 너구리 대신 열라면이나 오동통면을 산다면 5~6백 원 정도(5봉 기준)를 아낄 수 있죠. 심지어 레고 호환 블록도 있구요.
몇 년 전엔 네스프레소 캡슐에 대한 특허가 만료되면서 호환 캡슐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습니다. 새로운 머신으로 경쟁하려던 시도가 번번이 실패한 뒤에, 이제 네스프레소 플랫폼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캡슐로 경쟁하려는 겁니다. 덕분에 돌체구스토에 밀리는 듯하던 네스프레소 머신도 다시 잘 팔리고 있는데, 이게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기업들은 소비자가 호환 제품에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여러 방법들을 씁니다. '정품' 인증 마크를 개발하고, 순정 부품을 쓰지 않으면 A/S를 안 해준다거나, 고장이 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협박도 하죠.
하지만 가격 앞에 장사 없습니다. 정품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없지 않지만, 한두 번 별문제 없이 쓰다 보면 또는 주변에서 잘 쓰고 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오히려 적극적인 호환 제품의 옹호자가 되곤 합니다.
호환품은 짭이 아닙니다.
혹시 'NICE'나 'PAMA'를 아시나요? 실제로 본 사람은 없고 구전이나 짤로만 경험해서 과연 진짜 존재했었는지 의심스러운 브랜드들이죠. 또 이제훈이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입고 나왔던 'GEUSS'도 있습니다. 이런 브랜드들을 우린 짭이라 부릅니다.
짭과 진품의 차이는 뭘까요? 과거엔 TV 광고를 하는 유명 브랜드와 그 유명세에 기댄 유사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렇기에 어설프게 흉내 낸 브랜드들이 나오는 거죠.
하지만 지금의 호환품은 그때의 짭과는 좀 달라요. 사람들은 어설픈 허영심이나 대리만족을 위해 호환품을 사는 게 아니라, 굳이 비싼 돈을 낼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선택을 하니까요.
질레트 면도기를 사기 위해 한 달에 20달러를 내시겠어요?
그중 19달러는 로저 페더러에게 갑니다.
질레트 대신 DSC(Dollar Shave Club)의 면도날을 사라는 바이럴 영상에서 설립자인 마이크가 한 말입니다. 로저 페더러는 당시 질레트 광고의 모델이구요. 이 말이 진실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설득력이 있죠. 자사의 면도날은 쓸데없는 기능을 빼고 고작 1달러이니 남은 돈을 어디에 쓸지 결정하라고 합니다.
질레트 같은 오리지널 브랜드에겐 정말 섬뜩한 상황이죠. 여러분의 브랜드가 어렵게 1등의 자리에 도달했는데, 이런 호환 브랜드나 대체할 수 있는 제품들이 우리의 자리를 위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환품보다 몇 배 더 지불할 이유.
얼마 전 끝난 CES에서 삼성과 LG는 각각 경쟁사의 전자 제품에도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홈 시스템을 발표했습니다. HCA라는 글로벌 표준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2023년 상반기 중에 LG 씽큐로 삼성 공기청정기를 외부에서 켜거나 끄는 것도 가능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그뿐인가요? 중소기업의 제품이나 중국산 제품들도 표준 규격만 따른다면 LG나 삼성의 에코 시스템에 편입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네이버나 카카오, 구글 같은 빅테크 기업도 이런 걸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고요.
기존에 각 브랜드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쌓아왔던 장벽들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브랜드의 프리미엄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요? 소비자의 브랜드 충성도는 무엇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앞서 예를 들었던 '네스프레소'는 특허 만료되는 시점에 스타벅스와 제휴를 합니다. 스타벅스의 캡슐은 네슬레(네스프레소 & 돌체구스토)의 플랫폼으로만 이용할 수 있죠. 또 버츄오라는 새로운 캡슐 규격을 만들었어요.
아마도 최근에 네스프레소 머신을 구매한 고객이라면 버츄오로 살 것인가? 아니면 기존 규격(오리지널)으로 살 것인가? 를 놓고 고민을 좀 하셨을 것 같습니다. 만약 오리지널 커피 머신을 산다면 다른 커피 브랜드에서 내놓은 호환 캡슐도 사용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네스프레소의 모든 캡슐에다 스타벅스 캡슐까지 이용 가능하다면 굳이 맛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오리지널 머신을 살 것인가 좀 망설이게 되죠.
혁신적인 회전 추출로 탄생한 풍성한 크레마와 깊은 바디감.
혁신적인 회전 추출이 뭔지, 깊은 바디감이 어떤 맛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오직 버츄오만이 이런 맛을 낼 수 있다 하니.. 이왕 비싼 네스프레소 머신을 산다면 이런 장점을 포기하긴 쉽지 않겠죠. 네스프레소는 이렇게 나름의 방법으로 브랜드 프리미엄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루션은 각 브랜드들이 처한 상황이나 고객의 니즈에 따라 또 달라지겠죠.
우리 브랜드도 호환 가능한 제품들이 있나요? 그 호환품 대신 소비자가 우리 브랜드를 선택하게 할 이유를 어디에서 만들어 내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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