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조달청의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인 ‘나라장터’에 오류가 생겨 1시간 가량 접속이 지연됐다. 이른바 ‘공공입찰’ 시즌인 상황에서 일어난 오류는 지난달 23일에 이은 두 번째 돌발상황이다. 조달청은 장애 시간 동안 입찰 서류 제출 마감 일시가 도래한 2486건의 입찰에 대해 이날 오후 1시 30분까지 연기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조달청이 추정한 원인은 ‘이용자 증가’ 즉 접속 폭주다. 연말에 입찰이 집중되는 상황이 올해 만의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궁색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올해가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유난히 공공 전상망과 관련된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부하는 ‘전자정부’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오점이 됐다.
문제는 이러한 공공 전산망 먹통 사태가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에 정치권을 비롯한 업계, 그리고 정부에서는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서는 모양새다.
전문가와 업계에서는 “공공SW사업 방식 곳곳에 포진돼 있는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고는 이러한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14일 국회에서 개최된 ‘디지털 대전환 시대, 공공SW사업 현안과 대응전략 마련’ 토론회에서도 이와 같은 의견들은 강도 높은 발언들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공공정보화 사업 유찰율 급증, ‘을’의 반란 ‘더 이상 적자 감수 불가능’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와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 공동주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첫 발제를 맡은 강용성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산하 정책제도위원회 위원장은 ‘공공SW사업 현안 및 산업계 이견’을 주제로 “2021년 기준으로 47.7%였던 공공정보화 사업 유찰율이 2023년 1월 기준으로 11개 중 8건에서 유찰이 발생되는 수준으로 증가했다”며 현 상황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이는 공공SW 사업에 참여하는 수행 업체들이 ‘더 이상의 적자 감수 사업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는 의미다. 강 위원장은 이와 관련 “결과물 완성 시점에 변동성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사업 특성을 반영해 예비비를 책정하거나, 과업변경시 발주자에게 IT감사를 면제시켜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공공SW 사업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핵심은 품질입니다. 좋은 품질을 위해서는 적덩한 대가와 계획, 합의가 이뤄져야 하죠. 그 중요성을 그간 오래도록 강조해왔지만, 협회 회원사 통계 데이터 기준 공공 비중이 높은 회사들의 영업이익율은 -0.4%(2021년 기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좋은 품질의 기술을 시장에 공급하지 못하게 하는 현상을 만들고 있죠. 근본적인 방안은 ‘대가의 현실화’입니다.”
이어 강 위원장은 “SW사업은 더 이상 노동을 제공하는 사업이 아닌 지식과 기술을 공급하는 사업”이라며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공급되는 지를 살피면서 좋은 기술들이 합리적으로 공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강 위원장은 경직되고 독소조항이 많은 계약 구조의 개선 필요성도 언급했다. 사업의 예비비와 같은 항목을 개설해 SW사업 변동성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개발 규모 단가 가치 절하를 감안한 현실적인 수준의 원가 인상, 물가 및 인건비 상승분 매년 반영 정례화 등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SW 특성 반영한 유연한 계약제도 도입 제안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유호석 소프트웨어 정책연구소 실장은 “SW 특성을 반영한 유연한 계약제도 도입방안’을 주제로 발표를 이어갔다. 유 실장은 “우리나라 국가계약제도는 하드웨어 적”이라며 “건물, 도로, 교량 등의 건설 혹은 물품 등을 구매하는데만 적합한 계약 제도로 디자인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 실장은 “이러한 계약 구조는 유연한 SW의 특성과 맞지 않다”며 말을 이어갔다.
“SW 개발 역시 시대를 거듭하며 워터폴(Waterfall)에서 애자일, 데브옵스로 변화하고 있죠. 이미 스타트업계에서는 이런 진화적 방법론들을 적용해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개발업무와 유지보수가 다른 것이 아닌 같은 선상에 있는 거죠. 물론 프로젝트에 따라 워터폴이나 애자일, 데브옵스가 각각 적합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관행적으로 사실상 도급계약 방식을 적용하는 국가계약에서는 확정가가 바탕이 돼 있죠. 개발에 따른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전제가 돼 있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도급계약에서 파생하는 것인데 이런 프로젝트는 개발자와 사용자의 소통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도급관리자(기관 담당자)를 통해야 하는 것으로 돼 있죠. 하지만 애자일의 사상은 사용자와 개발자가 함께 앉아 스토리텔링을 해가며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죠.”
문제제기 후 이어진 대안 제시를 통해 유 실장은 미국과 영국 등의 사례를 언급했다. 그중 미국의 경우 2012년 오바마 정부 당시부터 적용된 모듈형 변동계약 방식이다. 이는 ‘원가 정산 계약’과 ‘시간&자재 계약’으로 나눠지는데, 원가 정산 계약은 원가에 판매자의 수수료를 더해 판매자에게 지불하는 계약으로 계획한 과업량을 초과한 경우 원가를 조정해 지불할 수 있고, 원가·일정·기술적 성과 목표를 초과달성 시 성과급 지급의 근거가 마련돼 있다. 또 ‘시간&자재 계약’은 원가정산 계약과 고정가 계약의 두 장점을 섞은 복합형 계약으로 단가는 고정하되 투입되는 자재와 시간이 변경되는 방식이다. 이어 유 실장은 “이는 애자일 수용적 공공SW 계약제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며 미국 디지털혁신청(USDS)를 언급했다.
“오바마 정부에서는 오바마케어 실행을 실패하면서 애자일을 도입하고 오픈소스를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만들어진 것이 디지털혁신청이죠. 미국 디지털혁신청은 애자일 방법론을 지원하기 위해 ‘Tech FAR’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SW 조당체계 내에서 효율성과 예산을 조화시켰습니다. 기관 요구사항 식별이 쉽지 않은 경우 모듈형 변동계약 방식을 하이브리드 식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한편 이어진 이날 토론회는 좌장을 맡은 임경수 서강대학교 교수와 발제를 맡은 깅용성 위원장, 유호석 실장을 비롯해 김회수 행안부 디지털정부정책국장, 장두원 과기부 소프트웨어산업과장, 김현철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시장환경개선팀장, 김태수 모비젠 대표, 이정택 쌍용정보통신 본부장 등이 참석한 정부, 기관, 업계 대표자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특히 업계 대표자인 이정택 본부장 ”최근 문제가 발생한 사업들의 책임사업자 대부분은 상호출자제한대기업사업자로 기업 규모가 현재 공공SW사업의 품질저하의 근본적인 원인이라 지적하는 것은 연목구어에 지나지 않는 진단과 처방“이라며, ”과업 규모 변경에 대한 투명한 공개와 절차적 타당성, 유연한 계약 등 관련 제도 개선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태수 대표는 ”공공SW 개발 사업에서 발주처 요청으로 과업 변경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에 따른 추가 비용은 고스란히 수행사에게 전가되고, 사업 단계별로 필요한 의사 결정을 발주처가 미루거나 또는 정보 제공이 미흡해 발생되는 기간 지연 비용 또한 수행사가 부담하고 있는 실정“이라 토로하며 ”과업심의위원회를 개최하는 경우 변경 사항 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수행 사업자가 참여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협의가 이루어졌으면 한다“고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