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논란 속에서도 한일 정상회담이 급물살을 타게 되며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종종 ‘멀고도 가까운 나라’로 표현되는 일본은 사회·경제적으로 한국과 밀접 관계를 맺어왔다. 역사문제,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냉온탕을 반복하지만 한일간 문화와 경제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한일 간 교류의 특수성은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억눌렸던 여행 수요가 폭발하는 상황에서도 드러났다. 국가 간 갈등 상황과 무관하게 엔저와 무비자 입국의 영향으로 일본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한 것이다. 이 같은 시장 상황에서 최근 일본 내 최대 여행 구독 플랫폼 ‘하프(HafH, Home Away from Home)'를 운영하는 카부크스타일(KabuK Style)이 호스피탈리티 테크 스타트업 히어로웍스에 전략적 투자를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카부크스타일이 운영하는 하프는 구독자에게 여행지를 맞춤 추천해주는 서비스로 2019년 4월 출시돼 급성장을 거듭하했다. 현재는 36개국, 512개 도시로 사업을 확장하며 하얏트·메리어트·프린스 등 5성급 호텔부터 일본 지방 온천까지 약 1200개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
히어로웍스는 2021년 국내에서 드물게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RMS(Room Management System) ‘데이터메니티’를 개발해 국내 300여개 호텔, 리조트 등 숙박시설을 고객사로 보유한 스타트업이다. RMS는 호텔 등 숙박업체가 시장 현황과 이용·변동 추이, 수요 예측 등 여러 데이터를 활용해 매출과 수익을 관리하는 디지털 솔루션이다.
카부크스타일은 이번 투자를 통해 자사 하프 플랫폼과 히어로웍스의 RMS 연계를 추진, 일본과 글로벌 숙박시설의 디지털 전환을 주도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흥미로운 것은 B2C(소비자 대상 비즈니스) 모델로 한 일본 업체와 B2B(기업 대상 비즈니스)를 모델로 하는 한국 스타트업이 손을 잡는 과정에서 한 사람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로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컨설팅하는 배승호 PPB international(이하 PPB) 대표다.
와세다대와 북경대에서 국제학을 전공한 글로벌 스페셜리스트
“우장산 근처에 있는 명덕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이후 미국 유학을 준비했는데, 재수를 하는 과정에서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시아계가 미국 대학을 졸업해도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죠. 또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시기였고요. 그때부터 홍콩, 싱가포르, 일본, 중국 등의 대학을 알아보기 시작했죠. 그러다 와세다 대학이 북경대와 연계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렇게 일본과 중국에서 총 5년간 공부를 하게 됐어요.”
서울시청 인근 카페에서 만난 배 대표는 지난 이력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체류하며 카부크스타일의 한국사업책임자역이자 히어로웍스의 이사로 두 회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히어로웍스 RMS의 일본 현지화와 하프의 한국 진출을 위한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와 같은 크로스보더(cross border) 비즈니스는 이미 익숙한 일이다. 특히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을 지원한 사례는 스낵24, 휴먼스케이프, 플로우, 프리윌린 등 지난 3년간 50여건에 이를 정도다.
와세다대(국제교양학부)와 북경대(국제관계학)에서 공부한 그가 기업의 해외 진출과 투자를 지원하는 전문가가 되기까지는 군대와 일본 회사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공군학사장교 128기인 그는 한국어를 비롯한 3개국어(영어, 일본어, 중국어)가 가능한 특기를 살려 방위사업청의 차세대 전투기 사업(FX사업)에서 협상팀에서 영어 통역을 맡았다. 이후 일본 소재 외자계 컨설팅 회사 언스트 & 영(Ernst And Young), 일본계 벤처캐피탈(VC)인 본즈 인베스트먼트 그룹(Bonds Investment Group)에서 투자 매니저로 경험을 쌓았다. 그렇게 일본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 15년째다.
“오래전부터 크로스보더 비즈니스를 하고 싶었어요. 일본계 회사에서 근무하며 국제 세무와 관련된 업무, 협상 등을 담당했어요. 투자도 경험을 했고요. 그렇게 한 6년 정도 경험을 쌓고 PPB international을 창업한 거죠.”
한국과 다른 일본의 투자 환경, B2B 모델이 강세
그새 PPB international 역시 5년여의 업력을 가진 회사가 됐다. 그렇다면 배 대표가 그간이 경험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투자 환경은 어떨까? 우선 일본은 B2C 보다 B2B 기업이 더 강세를 보인다. 투자도 B2B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투자에 나서는 VC 환경도 한국과는 꽤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일본의 투자 데이터베이스로 불리는 ‘이니셜’에 따르면 일본 투자 시장의 독립형 VC는 355개에 달한다. 그 중 40개가 시리즈 B 리드를 하는 곳이다.
배 대표가 근무했던 본즈 인베스트먼트 그룹이 그중 하나다.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PPB를 창업 후 1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의 투자를 리드했다. 그 경험을 통해 그가 얻은 인사이트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우선 일본은 전반적으로 벤처(스타트업) 투자에 그렇게 적극적인 편이 아니에요. OECD 자료를 봐도 GDP 대비 한국보다 현저하게 투자 비중이 낮죠. 두 번째로는 (스타트업 환경에서) 영역별 톱 플레이어가 있다기보다 중소 플레이어들이 여럿 존재하는 시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직 1000억 이상 조달 받지 않은 벤처가 많고, 과정화가 진행되고 있는 시장이라고 할 수 있죠. 마지막으로는 B2C보다 B2B에 돈이 더 몰리는 시장이라는 점이예요. ERP시스템이나 회계노무 시스템, IoT(사물인터넷), 메디컬 쪽 투자가 많이 이뤄지는 양상을 보이죠.”
이어 그는 “일본 VC는 동급 규모의 회사가 투자한 시리즈 라운드에는 동참하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즉 하나의 리드 VC가 투자를 한 곳에는 다른 리드 VC가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망한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이유다. 대신 우주나 로봇, 클린 에너지와 같은 독특한 영역에 투자도 적잖이 이뤄진다는 특성이 있다. 또 다른 차이는 한국과 달리 VC와 창업가 간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처럼 벤처 투자자가 나와서 창업을 하는 케이스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상대적으로 창업 생태계가 경직된 편이라 밑에서 시작해 톱으로 올라가기 힘든 문화가 있죠. 저 역시도 그 안에서 비주류로서 느꼈던 답답함이 있었어요. 그 외에도 한국과 달리 정부 지원이 거의 없어요.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와야지 지원이 되고 그 마저도 입찰로 이뤄져서 가격 경쟁을 해야 하죠. 한국과 같이 MVP(최소요건제품)도 없이 사업계획서만으로 투자를 받는 사례는 부러울 정도예요.”
한국 스타트업의 일본 진출은 어떻게?
배 대표는 “일본 진출을 고려하고 있는 한국 스타트업이라면 디지털 전환이 이뤄지지 않은 시장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고 말을 이어갔다.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경쟁력이 있는 분야도 있고 없는 분야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여행 플랫폼의 경우 호텔이나 항공사, 렌터카 등 각 분야에 운영 시스템이 온프레미스(on-premise, 자체 구축 시스템)인 경우가 여전히 많아요. 대략 80% 가까이 되죠. 2021년에 한국은 여행 플랫폼 등에 트레블테크가 발달하며 자금조달이 많이 이뤄진 반면, 일본은 거의 고사 위기였어요.”
반면 배달 플랫폼 등 서비스 수준이 일본보다 높은 B2C 부문 역시 경쟁력이 있다. 배 대표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여전히 ‘전국시대’와 같은 상황으로 절대적 우위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기업이 없다는 것이다. 투자를 유치한다고 해도 집중화되지 않고 분산돼 이뤄지기 때문에 같은 규모라면 넉넉한 자금을 유치한 한국 스타트업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자금조달이 잘 되는 플레이어들이 많으니, 일본 B2C 플레이어에 비해 유리한 점이 적지 않죠. 실제로 그런 여러 장점 덕분에 일본 진출을 하고 싶어하는 한국 스타트업이 많아요. 문제는 일본 진출과 관련된 시장 정보가 많지 않다는 거죠. 그러다보니 파트너십을 통해 진출하는 사례가 많은데, 이 역시 파트너사를 통해 얻는 정보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있어요. PPB는 그런 상황에서 정확한 시장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의 니즈가 맞는 기업 간에 파트너 십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앞서 언급된 카부크스타일과 히어로웍스의 파트너십이 대표적이다. 자금조달을 지원하며 카부크스타일과 인연을 맺는 배 대표는 코로나19 이후 방향성을 두고 디지털 전환에 힘을 싣기를 원하는 카부크스타일과 협력할 수 있는 기업을 찾다가 히어로웍스를 알게 되고, 이것이 전략적 투자로 연결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PPB는 현재 ‘미네르바(Minerva)’로 명명된 해외 벤처 데이터베이스를 론칭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The VC’나 ‘혁신의숲’이 있고 해외에도 크런치베이스 등이 있죠. 일본에서도 물론 앞서 언급한 ‘이니셜’이 있긴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영어를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라 해외 투자자 데이터를 보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미네르바를 통해 해외 투자자 데이터를 일본어로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를 베타 버전으로 시작하고 있죠. 결과적으로 일본 스타트업들의 해외 투자 리터러시를 높이는 작업이라 할 수 있어요. 이제까지 PPB를 통해 컨설팅을 하긴 했지만, 그런 과정이 플랫폼 상으로도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향후에는 일본 벤처 스타트업을 미국 투자와 연결시키고, 일본 진출을 원하는 한국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것도 가능해 질 거예요.”
배승호 PPB international 대표의 ‘일본 진출 고려하는 스타트업을 위한 팁’
1. 일본 시장의 경우 기본적으로 DX가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다수 존재하는 기존 플레이어 간 역학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드시 잠재 고객, 잠재 파트너사의 인터뷰나 히어링을 통한 시장 조사를 실시하고 진출하는 것이 좋다. 또한 '기존의 일본 파트너가 알아서 시장 조사하겠지' 아니면 '일본 담당자가 조사하겠지'로 너무 손 놓지 말고 되도록이면 대표가 직접 관여하며 뉘앙스를 체크하는 것을 추천한다.
2. B2B서비스의 경우, 일본은 ‘플랫폼이니까 모두 쓸 수 있습니다’ 또는 ‘한국에서 이렇게 잘 나가는 서비스입니다’보다도, ‘당신의 이런이런 니즈를 이렇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서비스 입니다’가 더 잘 먹히는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단위를 정하고 공략하는 것이 좋다. 또한 새롭고 유니크한 서비스의 경우, 시장 진입은 어렵지 않지만, 이후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지에 더 집중해서 영업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3. B2C서비스의 경우, 일본은 한국보다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가 많지 않다. 새로운 컨셉의 서비스를 선보일 경우 처음 진출 시 사용자 적응(user nurturing) 기간을 여유 있게 잡는 것을 추천한다. 처음부터 바로 전환(conversion)을 노리는 것보다 제휴 매체나 인플루언서 등을 통해 서비스 사용시 어떠한 이득이 있는지를 알려 인지를 어느 정도 쌓고 진출하는 것이 좋다. 그런 고려 없이 전환에 집중한 마케팅을 하게 된다면 코어 타깃 유저보다 비용을 의식한 유저만 확보하게 되면서 빠르게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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