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각 분야의 디지털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법조 분야 역시 큰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바로 ‘리걸테크(LagalTech, 법률과 기술의 결합으로 탄생한 기술 서비스)’다. 리걸테크가 주도하는 변화의 바람은 특히 기업과 개인을 대상으로 직접적인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변호사 업계를 대상으로 크게 일고 있다.
변화의 크기가 적지 않은 만큼 일부 리걸테크 업체의 비즈니스 모델은 직역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변호사 업계의 반발로 법적 논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마찰 없이 시나브로 시장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분야가 다름아닌 ‘판례검색 서비스’다.
이는 변호사를 고객으로 하는 비즈니스라는 점에서 일부 서비스에서 불거지고 있는 논란을 빗겨가고 있다. 오히려 변호사들이 고질적으로 겪고 있는 과도한 업무의 페인포인트를 해결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 보다 나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판례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리걸테크의 성장은 2001년 등장한 1세대 판례 검색 서비스 ‘로앤비’를 비롯해 지난 2019년 등장해 급성장하며 업계에서 다크호스로 불리고 있는 ‘엘박스’, 지난해 1월 등장한 ‘빅케이스’ 중심의 3강 구도로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화제가 되는 기업이 바로 법률데이터 검색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엘박스’다. 엘박스는 독자적인 기술력과 업체 최고의 판결문 데이터 확보를 통해 지난해 말 총 200억 규모의 시리즈B 투자유치에 성공하며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엘박스, 변호사 업무의 혁신을 이끌어 내다
판결문 등의 법률 데이터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은 사실 법원 사이트를 통해서도 일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한계가 존재한다. 1년이면 700만건의 소송이 진행되고, 거기서 나오는 판결문만 150만개에 달하지만, 온라인 검색으로 확인할 수 있는 판결문의 수는 제한적이다. 그 마저도 열람을 하기 위해서는 사건번호, 관계인 이름을 필수적으로 알고 있어야하고, 개인정보 등의 보호를 위해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판례’는 과거에 진행된 재판 중 유사한 소송에 대한 선례를 의미한다. 사건의 유사성에 따라 판례는 중요한 재판의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때문에 변호사들은 재판에 앞서 자신이 맡은 건과 관련된 수많은 판례와 정보를 사전 검토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다. 그 외에도 방대한 법률 데이터를 비롯해 주석서, 논문, 유권해석 등 검토해야 할 자료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엘박스는 이렇듯 방대한 법률 데이터를 수집·가공 후 독자적인 AI 기술과 연결해 변호사 실무에 최적화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업무 효율을 높이는 여러 편리한 기능도 주목받고 있지만, 대내외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것은 최근 210만건을 넘어선 독보적인 판결문 데이터다. 이중 94% 가량이 상급심 재판 시 중요한 검토 자료가 되는 하급심 판결문이다. AI 기반의 검색 툴로 유사판례 검색은 물론 판사에 따른 판결 성향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디테일한 변호사의 니즈가 반영될 수 있었던 것은 엘박스의 이진 대표가 변호사 출신의 창업가이기 때문이다. 강남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 대표는 “어법 상 약간의 어폐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걸테크는 120% 데이터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다”며 “변호사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서비스에 집중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데이터 비즈니스 관점에서 리걸테크의 서비스 외연 확장을 하기 위한 첫 단추는 변호사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드는 것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판결문 검색 서비스로 시작했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판결문 공개율은 굉장히 낮습니다. 때문에 판결문이 대량으로 수집, 가공되고 검색 가능한 형태로 준비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획기적인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죠.”
‘판결문 데이터 확보에 집중한다’는 방침은 엘박스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엘박스는 업계 최초의 서비스가 아니었지만, 가장 빨리 방대한 판결문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이 대표의 노림수였던 많은 변호사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었다. 현재 엘박스를 이용하는 변호사의 수는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1만3000명에 달한다. 이렇게 확보한 변호사 고객 수는 엘박스의 또 다른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엘박스의 핵심 역량은 우선 판결문 데이터를 수집 가공해서 검색 가능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 돼 있습니다. 관련 특허만 4개를 보유하고 있고, 세계적인 학회에 AI 기술을 활용한 논문도 지속적으로 제출하고 있죠. 시간이 갈수록 판결문 데이터량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또 이를 통해 유입되는 변호사님들도 경쟁력이 되고 있죠. 저희에게 있어 변호사님들은 차려 놓은 밥상을 수동적으로 드시는 고객이 아니에요. 무엇이 필요하고 보강돼야 하는지 끊임없는 요구사항을 주고 계시죠. 다시 말해 엘박스가 보유하고 있는 판결문 데이터는 저희가 임의로 선택해 만든 것이 아니라, 엘박스를 이용하는 변호사님들이 가장 필요하고 실무적으로 중요하다고 제안해 주시는 것들이라는 거죠. 즉 엘박스는 많은 판례가 변호사를 모으고, 그 변호사들로 인해 더 좋은 판례가 쌓이고, 그것이 다시 더 많은 변호사를 모으는 구조를 만들고 있어요. 양적인 면 뿐 아니라 질적인 면으로도 순도 높은 데이터가 확보되는 거죠.”
탄탄대로 대신 선택한 스타트업이라는 모험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지만 필요한 일을 우직하게 하고 계시는 분들도 많죠. 하지만 똑똑한 사람이 목표를 위해 낮은 자세로 허드렛 일까지 기꺼이 감수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거기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거죠. 배달의민족 김봉진 대표님도 창업 초기 강남역에서 전단지를 모으셨고, 리멤버 서비스도 초기에는 창업자들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입력하며 시작했다고 알고 있어요. 저희도 똑같았어요. 초기에는 사무실도 없이 무료 공간에서 머리를 맞대고 일을 했고, 저는 그런 곳을 전전하면서 홀로 이미지로 입수된 판결문 타이핑을 쳤어요. 아침부터 시작해 새벽 2~3시가 넘기 일쑤였죠. 그렇게 하면 하루에 10개~15개 판결문을 칠 수 있었어요. 어떤 사건은 판결문만 500페이지가 넘고, 각주가 390번까지 있었던 건도 있죠. 그걸 치는 데는 2주가 소요되더군요. 엘박스의 서비스가 언뜻 모방하기 쉬워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된 시간과 노하우, 조직 구성은 따라할 수 없다고 자부합니다.”
스타트업에 있어 허슬링(Hustling, 악착같이 노력한다는 의미)은 필수 조건이라고 하지만, 유독 치열했던 초기를 돌이키는 이 대표에게서 남다른 고집이 느껴졌다. 이는 그가 창업 이전 거쳤던 과정을 알면 더욱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연세대학교 법학과 출신의 그는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이른바 ‘소년급제(어린 나이에 큰 성취를 이룬 것)’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 이후 행로도 탄탄대로였다.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군판사로 병역을 이행 한 후 국내 1위 로펌으로 손꼽히는 김앤장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5년여를 M&A(기업 인수합병)와 기업 관련 자본시장 전문 변호사로 커리어를 쌓았다. 이 대표는 “다른 일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며 당시를 돌이켰다.
“사법연수원 시절에는 당연히 판사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주체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기본 설정값과 같은 느낌이었죠(웃음). 그러다가 법무관 생활 중에 김앤장에서 일하시는 선배들을 통해 변호사 업무에 대해 처음 알게 됐죠. 사실 사법연수원의 교육은 판사 양성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그 전까지는 변호사 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는데, 얘기를 듣게 되면서 새로운 분야처럼 느껴졌고, 변호사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게 되더군요. 그렇게 가게 된 김앤장에서 굉장히 열심히 일했고, 그 시간은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기간에 다른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죠(웃음). 워낙 업무 강도가 세기도 했고, 도전적인 일의 연속이었던 탓에 딴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그렇게 해낼 수 없었기도 하고요.”
그런 그의 삶에 갈래 길이 나타난 것은 2017년 무렵이었다. 막연히 꿈꿨던 창업 열망으로 지원한 미국 버클리대학교 MBA 과정에 덜컥 합격한 것이다. 장학금이 제공되는,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미국에서 창업을 하겠다는 계획의 시작이자, 생각지도 않은 삼십대 중반의 김앤장 퇴사를 결행한 순간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계획이었죠.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때는 정말 프론트엔드, 백엔드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막연히 미국에서 창업을 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유학을 택했죠. 제 계획을 들은 주변 분들 조차 처음에는 믿질 않으셨어요(웃음).”
하지만 그의 생각은 유학 1년이 지난 무렵 바뀌게 됐다. 처절한 현실 인식 과정을 거친 덕분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언어와 이전까지 삶과 단절되는 불연속성, 부재한 사회적 자본으로 꼽았다.
“창업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스토리를 파는 사람이에요. 공동창업자, 투자자, 고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득을 해야 하죠. 그런 점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것이 큰 한계로 다가왔어요.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님에도 미국 창업에 성공하신 분들의 대단함을 깨닫게 된 경험이었죠. 두 번째는 제가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한다고 해도 이전까지 살아온 삶과 생각하는 창업 아이템은 불연속성이 너무 컸어요. 그리고 사회적 자본의 한계를 절감했죠. 한국에서는 제가 답을 몰라도 물어볼 사람들이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상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내 뿐이었어요. 고민 끝에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한국에 돌아가 리걸테크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것’으로 모아지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학 기간 동안 단 59일을 공부해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 창업의 꿈이 한계에 부딪히며 고민을 거듭하던 와중 남은 시간을 조금 더 값지게 보내기 위한 도전”이었다. 결과적으로 변호사 선서를 포기했지만, 자신감을 되찾은 경험으로 남아있다.
“당시에는 버클리대학교 로스쿨 독서실에서 아침에 바나나 두개와 우유 한통을 들고 가서 문닫을 때까지 공부했죠. 그렇게 딱 59일 공부해서 합격하고 이듬해 귀국을 했는데, 최종적으로 선서를 해야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즉시 창업을 한 상태였고, 결국은 선서를 포기했죠. 물론 주변에서는 미국 3일 갔다 오면 미국 변호사가 되는 건데, 뭐가 어렵냐는 말씀도 많이 하셨어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초기 스타트업에 와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한테 미국 가서 변호사 선서하고 오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요. 제 양심상 허용이 되지 않았던 거죠.”
데이터와 기술의 힘으로 법률 서비스를 효율화하고 사회적 비용을 낮출 것
“올해 하반기를 목표로 신규 서비스의 방향성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챗GPT를 활용해 엘박스의 검색 능력을 고도화하는 것이죠. 챗GPT는 엘박스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바꿔 말하면 변호사님들에게도 좋은 기회로 작용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물론 GPT의 파도 앞에 적잖은 버티컬 AI 서비스들의 비즈니스 모델이 사라지고 있기도 하죠. 이제까지 저마다 모래성 쌓기에 골몰하고 있다가 해일을 맞이하는 격이 되고 있어요. 그런 해일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는 고객과 데이터라고 생각합니다. 200만건 이상의 판결문 데이터를 수집, 가공해 맞춰 놓은 회사는 저희 뿐이라고 자부해요. 또 법률과 같은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휴먼 피드백이 굉장히 중요한데, 저희는 이미 함께하고 있는 변호사 고객 1만3000명을 확보하고 있죠. 세계 어느 서비스도 그 정도 수의 변호사와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해 놓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챗GPT는 저희가 제공하고 있는 검색 방법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 있어요.”
이어 이진 대표는 “법률은 사회적 관계에서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문제”라고 강조하며 향후 계획을 밝혔다. 기존 시장 주체들의 참여를 유도하며 변호사를 넘어 법률 전문 직역을 모두 아우르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사회적인 역할’이라고 정의하는 그의 말에 남다른 소명의식이 느껴졌다.
“변호사들이 저희의 대표적인 고객이지만, 유일한 고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시장 참여 주체들과 함께 법률 서비스의 불명확성을 낮추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도전은 엘박스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계속 사회적으로 맡아야 하는 역할이라고 보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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