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카이스트(KAIST) 자회사로 설립된 카이스트청년창업투자지주(이하 KVI)는 카이스트를 비롯한 공공연구기관의 연구성과를 활용한 청년 창업형 기술벤처 및 사회적기업 설립·육성을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다양한 시도를 이어왔다.
현재는 중소벤처기업부의 신기술창업전문회사(신창사) 및 팁스(TIPS) 운영사이자 VC(벤처캐피탈)로써 초기 스타트업 대상 투자는 물론 다양한 지원을 통해 혁신적인 기술, 비즈니스 모델의 사업화를 뒷받침하며 점차 그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 2020년 6월부터 KVI의 수장을 맡은 정회훈 대표는 3년의 임기 동안 기술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스타트업을 발굴·육성하는 임팩트투자에 집중하는 한편 4개의 펀드를 조성해 KVI의 투자 역량을 끌어 올리는 성과를 이뤄왔다.
지난 성과에 이어 올해 6월 연임으로 두 번째 도전에 나서는 정 대표를 만나 새로운 3년에 대한 계획과 함께 일찌감치 실리콘밸리에서 형성된 스타트업 생태계를 접하고 이를 한국에 접목해 온 그의 지난 시간, 힘겨운 ‘투자 혹한기’를 지나고 있는 국내 스타트업 투자 흐름 등과 관련한 전망을 들어봤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에 이바지해 온 지난 시간들
“지난 3년의 시간이 더 없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4개의 펀드를 조성해 KVI를 자기자본 계정에서 펀드계정을 통해 투자하는 회사로 만든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카이스트 출신 기술 기반 창업팀에 대한 투자를 통해 여러 유망한 스타트업을 많이 발굴한 것도 기억에 남네요. 서서히 일부 창업팀에서 투자금이 회수될 성과도 나오고 있어 KVI가 좀 더 안정적이 된 것도 보람이라고 할 수 있고요. 열심히 노력하는 스타트업들을 볼 때면 벌써 배 부른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웃음).”
온화한 음성으로 지난 성과를 이야기하는 정회훈 대표지만, 그 눈빛 만큼은 청년의 그것과 다름없이 빛나고 있었다. 오래도록 가능성을 보이는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해 온 내공은 숨길 수 없는 듯했다.
청년 시절 그는 서울대 경영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SK텔레콤의 핵심 팀 일원으로 SK그룹의 이동 통신 사업 진출에 힘을 보탰다. 이후 글로벌 경영 컨설팅 기업인 아서디리틀의 이사이자 TIME(텔레 커뮤니케이션, 정보, 미디어, 전자) 프랙티스 리더로서 정보통신 산업의 수많은 고객사를 대상으로 전략 개발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벤처기업에 대한 경영컨설팅을 진행했던 인연으로, 1999년에는 당시 국내 벤처기업 리더들과 함께 창업컨설팅 및 인큐베이션회사인 이커뮤니티를 창업하고 2006년까지 대표이사를 지냈다. 당시로서는 창업 생태계가 조성돼 있지 않던 국내에서 이커뮤니티는 액셀러레이터의 역할을 정립한 창업컨설팅사로 기틀을 잡았다.
이후 그는 2007년 실리콘밸리 소재 글로벌 벤처캐피탈펀드인 드레이퍼 벤처네트워크 펀드의 한국 펀드인 ‘드레이퍼 아테나펀드’의 공동 대표를 맡아 15년 가까이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해 글로벌 스타트업으로 육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난 시간들을 돌이키던 정 대표가 소회를 밝혔다.
“1990년에 처음 실리콘밸리에 가게 됐죠. 그리고 1994년부터 아서디리틀에서 새로운 기술로 창업한 벤처기업들을 만나 신기술동향 등을 분석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벤처캐피탈리스트를 만날 수 있었고요. 전 세계에서 새로운 기술, 사업 모델들이 모이고 다져져 나와 글로벌하게 뻗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저런 기업들이 나올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벤처·스타트업들이 외국계 경영 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팅을 받는 것은 비용 등의 문제로 쉽지 않았죠. 또 한국 현실에 맞는 최적화된 컨설팅도 받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1차 벤처붐이 불기시작한 1999년 무렵에 한국의 벤처 생태계를 조성·발전 시키겠다는 비전을 갖고 이커뮤니티를 설립했죠. 이제는 우리나라 벤처 스타트업계도 층이 두터워졌고, 재주있는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드는 경우도 많아졌어요.”
지금의 스타트업 투자 혹한기는 세 번째 사이클
한국 스타트업의 초기 생태계 구축에 일익을 담당하며, 정 대표는 벤처붐과 닷컴 버블(IT 버블)의 붕괴로 인한 위기 상황,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상황에서 스타트업이 직면하는 현실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봤다. 실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스타트업이 명멸해갔던 시간들이었다.
“각각의 위기 상황에서 많은 기업들이 없어지기도 하고 투자를 통해 받은 주식들이 휴지조각이 된 경우도 많이 있었죠. 굉장히 다이내믹한 시기였어요. 하지만 그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성공한 회사들도 많이 나왔어요. 모든 기업이 다 어렵고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 당시 등장해 지금 거대 기업이 된 곳들도 있으니까요. 특히 이커뮤니티 시절 다른 회사들과 함께 공동으로 당시만해도 없었던 벤처 컨퍼런스를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데모데이였죠. 그때 1등을 했던 곳이 바로 ‘싸이월드’ 2등이 증권정보 인터넷 기업인 팍스넷이었어요.”
이어 정 대표는 “1990년대 말 시작된 벤처붐은 IMF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이 위기를 겪으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나온 사람들로부터 시작됐다”며 “붐이 일어날 당시에는 많은 기업들이 클 수 있었지만 버블이 꺼지고 경기가 조정되는 과정에서 한계기업은 탈락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은 성장·발전을 거듭했다”며 말을 이어갔다.
“1990년대 말부터 벤처·스타트업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델이 만들어졌고 이후 그 모델이 계속 이어졌죠. 초기 IT 부문에서 촉발됐던 버블이 꺼진 당시가 1차 조정 시기, 또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2차 조정 시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입장에서 보자면 최근의 ‘스타트업 투자 혹한기’라 불리는 상황은 사실 예견됐던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각국 정부는 돈을 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고, 코로나19 위기가 관리되면서 다시 긴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니까요. 전반적으로 투자가 보수적이 된 상황에서 가능성을 가지고 시작한 기업들은 그것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혹은 자체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경우 투자 받기 힘들어 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이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죠”
정 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위기와 기회는 기업들에게 ‘양날의 검’처럼 다가온다. 칼자루를 쥔 기업들은 성공하지만 날을 쥔 기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스타트업이라면 언젠가는 직면하게 되는 숙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창업팀은 경제가 어려울 때 많이 나와, VC의 역할 확장 필요
펀드를 조성해 투자를 하는 VC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펀드의 수익률이다. 하지만 정 대표는 VC의 목표가 수익만이 되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며 스타트업들이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고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자로서의 역할 확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익률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투자사를 발굴하며 사회적 가치창출 가능성을 검토하고 투자의사결정에 반영하고 있어요. 우울증 등으로 인한 사회문제, 에너지, 수자원, 기후 문제 등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 중에는 기술 기반으로 풀 수 있는 것들 또한 많으니까요. 특히 저희 역할 중에는 카이스트의 창업 생태계를 확장해 나가면서 그 성과를 기반으로 또 다시 후배 창업팀에 대한 투자가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미션도 있습니다. 그런 미션을 가진 저희로서는 VC들이 투자에만 머물지 않고 스타트업을 빌드업하고 함께 성장시키는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최근 그런 VC들이 점점 등장하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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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정 대표는 “경제가 어려울 때 오히려 좋은 창업팀이 많이 나오게 된다”며 현재의 ‘투자 혹한기’ 상황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기도 했다.
“현재 벤처펀드는 20조 이상 결성된 펀드들이 있어요.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아 투자를 하지 못하는 중이죠. 벤처투자는 투자 밸류체인의 가장 상단에서 시작되는데, 프리 IPO(기업공개) 시장, IPO시장, 상장시장 등이 모두 어려우니 VC들의 투자가 진행되지 못한 것이예요. 하지만 벤처펀드에는 펀드수명, 투자기한 등이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투자를 줄이거나 못하고 있는 펀드들이 언제까지나 투자를 안 할 수는 없어요. 올해 하반기, 적어도 내년 상반기 경에는 경제상황을 보아가며 다시 투자가 시작될 것이라 봅니다. 지금도 좋은 창업팀들은 계속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위기의 순간에 기회를 잡는 스타트업, 즉 ‘성공하는 스타트업’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오랜 경험을 통해 정 대표가 꼽는 특징은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우선은 시장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이고 차별적인 제품·서비스 기술력을 보유한 스타트업이다. 창업팀의 성공 경험과 독보적인 전문성, 노하우도 중요한 요소다. 세 번째로는 고성장하는 산업 혹은 미래 유망 산업 분야에 도전하면서 그 안에서 선도적 지위를 확보할 가능성을 보이는 경우다. 마지막으로 사업의 핵심지표, 재무실적 등에서 주목할만한 성장 추세를 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어 정 대표는 “경제에도 사이클이 있듯, ‘스타트업의 성장은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이라는 관념적인 접근을 경기순환 측면에서 살펴보면 왜 스타트업과 혁신 생태계가 중요한지 알 수 있다”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 사례를 보면 IT를 근간으로 하는 스타트업과 혁신 생태계가 크게 성장하며 기존의 전통적인 경기순환 패러다임이 바뀌고 호황이 끝난 뒤 침체할 것으로 예상되던 경기 사이클을 더 확장적으로 이끌어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정치적 정책적 지배력을 통한 경기 사이클 확장기를 연장할 수는 없죠. 그렇다면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변수를 통해 확장기를 넓히는 방법 뿐인데, 검증된 방법은 스타트업과 혁신 생태계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 대표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M&A 활성화, CVC 규제 완화 등 스타트업 관련 정책에 대해 “우리나라의 스타트업 생태계 뿐 아니라 경제의 혁신 생태계를 키울 수 있는 시도”로 평가하고 있다. 과감한 M&A와 대기업-스타트업 간의 전략적 협업을 통한 성장 모델은 실제 일찌감치 그가 경험한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정 대표는 “스타트업의 경쟁력은 나이테 같이 형성된다”며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스타트업들을 향한 응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자원과 역량이 비슷한 기업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지냈는지에 따라 나무의 나이테가 형성되듯 기업의 경쟁력이 형성되며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나오게 되죠. 어려운 시기지만 도전하고 맞서고 이를 넘어서는 스타트업에게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가 오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