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전환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혁신적인 온라인 플랫폼들은 종종 오랜 관행처럼 이어져왔던 각 분야의 문제들을 놀라운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최근 앤틀러코리아 배치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스타트업, 스포트라이트가 시도하는 도전 역시 그렇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패션, 뷰티 등 상업촬영 분야에서 고질적인 문제로 지목됐던 불공정 계약과 대금 체납, 실제 협의된 내용과 다른 촬영 등이다. 화려한 무대 뒤에 이끼처럼 껴 있던 오래된 문제들은 이들이 선보이는 전문모델 검색 플랫폼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스포트라이트의 도전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주체 중 한 명이 글로벌 무대에서 실제 활동하고 있는 캐나다 출신 모델, 벤자민 호리라는 점이다. 그의 힘이 되어 준 최한나 대표는 본래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임팩트 투자사에서 커리어를 이어온, 이른바 스타트업계의 사람이다. 국경을 넘어 우정을 이어 온 두 공동창업자가 의기투합해 선보인 스포트라이트가 담고 있는 가치, 그리고 성장 로드맵을 들어봤다.
상업 촬영 시장의 문제는 탤런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야
“상업 촬영 업계에서는 탤런트(모델)만이 아니라 탤런트를 찾는 클라이언트도 다양한 고충을 겪고 있어요. 우선 탤런트 들의 경우 부당하고 불공정한 계약, 촬영 후 6개월에서 길게는 9개월까지 지연되는 대금 체납, 촬영 직전에 촬영 범위나 용도 등의 조건이 바뀌는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대부분의 경우 중간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델료에 손을 대고 정작 모델에게는 적은 비용만을 지급하고 있죠. 반면 클라이언트에게는 실제 모델료의 최대 3~5배까지 초과로 청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이런 문제 때문에 재능이 있는 탤런트가 적은 모델료로 촬영에 임한다고 해도 신인 디자이너들은 비용 부담에 적잖이 힘들어하고 있죠.”
미소 띈 얼굴로 첫인사를 한 뒤였지만, 오래도록 모델 업계에 있으며 자신이 직접 격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벤자민 호리 스포트라이트 CSO의 표정은 이내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가 이야기 하는 문제는 사실 이미 과거 여러 산업 분야에서 동일하게 불거졌던 문제이기도 했다. 핵심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중간 지점에서 일어나는 불투명한 관행들을 혁신하는 것이다. 함께한 최한나 대표 역시 벤자민 호리 CSO의 문제 의식에 공감하며 스포트라이트가 시도하는 혁신을 이야기했다.
“상업 촬영 분야의 플레이어 중에는 중간에 모델들의 프로필을 받아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매칭을 해주는 에이전시가 있어요. 사실 스포트라이트가 하려고 하는 역할도 이와 유사해요. 다만 기존의 방식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도록 솔루션을 통해 공정한 계약을 기반으로 투명성을 확보하며 모델과 클라이언트 모두의 니즈를 충족시킨다는 점이 다르죠.”
아날로그 방식으로 진행됐던 클라이언트와 모델 간의 매칭을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플랫폼화하는 시도는 특히 세계 각국의 모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과거의 방식으로는 특정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에이전시가 제시하는 모델 풀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통해서라면 클라이언트는 세계 각국의 모델 풀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고, 모델로서도 자신과 핏이 맞다고 생각하는 클라이언트를 대상으로 흥미를 불러 일으킬만한 자기소개를 할 수 있다. 벤자민 호리 CSO 역시 이 부분을 강조했다.
“스포트라이트에 가입한 모델은 본인이 원래 진행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훨씬 더 확장된 활동을 할 수 있죠. 플랫폼에 들어오면 한국은 물론이고 각자가 기반으로 둔 현지화 시장에서 촬영 건을 검색하고 구할 수 있어요. 또 각국의 에이전시, 프로덕션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어 다양한 스타일의 모델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죠. 이는 프리랜서 뿐 아니라 에이전시에 전속된 모델들에게도 본인을 노출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작용하고 있죠. 한 마디로 모델 개인이 어디에 있든 전 세계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본인의 홍보가 가능해 졌다는 의미입니다.”
국경과 분야를 넘어선 인연, 앤틀러코리아에서 꽃 피다
스포트라이트가 탄생하기 이전은 어떨까. 최한나 대표와 벤자민 호리 CSO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최 대표의 경우 임팩트 투자사에서 인도 시장을 대상으로 스타트업 육성과 초기 투자를 검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 때문에 해외 경험이 풍부하리라 생각했지만, 해외 경험은 ‘캐나다 어학연수’ 뿐, 순수한 국내파로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벤자민 호리 CSO의 아버지는 일본인, 어머니는 캐나다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캐나다로 이주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다. 이후 수의사를 꿈꾸며 대학에 진학했고 지역 동물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삶이 바뀐 것은 여름 방학 기간에 집 근처 스포츠센터에서 일을 할 때였다. 회원의 부모 중 한 명이 모델 일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모델 일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초기 3년여 동안은 중국을 비롯해 몽골과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전역의 촬영지를 섭렵하며 경험을 쌓았다. 팬디, 돌체앤 가바나, 샤오미 등 큰 쇼에 참여하며 모델로서 커리어를 쌓아간 그는 세계 1위의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유럽 등에서 활동을 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문제는 코로나19였다. 팬데믹 상황에서 모든 것이 중단됐고 심각했던 상황이 어느 정도 해소된 뒤 그가 택한 것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이었다. 첫 시작을 했던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갈 수 있는 나라이기도 했고, 팬데믹 이전의 방문 당시 좋았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 생활은 그가 스타트업 창업이라는 또 다른 비즈니스 기회와 조우하게 했다.
벤자민 호리 CSO가 거쳐온 지난 여정에서 최 대표와의 인연은 그가 처음 모델로서 한국에 방문했을 당시 함께 알고 있던 친구를 통해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친구를 넘어 사업 파트너가 된 과정은 어떨까? 처음 제안을 한 것은 벤자민 호리 CSO 쪽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상업 촬영 분야에 대한 문제 의식은 이를 해결하겠다는 사업 아이디어로 구체화됐고, 이는 다시 스타트업계에서 몸담고 있던 최 대표에게 함께하고 싶다는 제안으로 이어졌다. 최 대표는 “다양한 스타트업이 시작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친구의 제안을 받으니 덜컥 겁이 났다”며 앤틀러코리아 배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과정을 털어놨다.
“제가 알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가능성 보다는 리스크가 더 크게 보였어요. 처음에는 좀 막막했죠. 당시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펀딩과 당장 플랫폼을 만들어 줄 수 있는 테크 리드였어요. 또 이 비즈니스를 발전시키는데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멘토도 필요했죠. 앤틀러코리아의 배치 프로그램은 이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춰진 과정이었어요. 처음 시작은 말 그대로 아이디어였다면, 배치 프로그램을 통해 너무 훌륭한 동료 창업가들의 조언과 쓴 소리를 통해 스포트라이트가 탄생한 거죠.”
검증은 끝났다, 고도화에 돌입한 스포트라이트의 다음 행보는?
지난 달 말 진행된 앤틀러코리아 배치2 데모데이에서 두 사람이 함께한 스포트라이트의 발표는 첫 무대를 장식했다. 발표를 통해 최 대표는 스포트라이트 플랫폼의 검증 과정에서 발견한 가능성과 성과를 제시했다. 스포트라이트는 PoC(개념검증)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500여명이 모델 풀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브랜드를 포함한 총 64개의 브랜드와 촬영을 진행했다. 고무적인 것은 스포트라이트를 경험한 모델들이 100% 다시 이용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고 실제 그 중 14%가 2개월만에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촬영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최 대표는 그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초기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앤틀러 배치 프로그램을 통해 테크 리드를 맡을 CTO를 찾는 것이 목표 중 하나였어요. 수많은 스타트업의 시작을 보며 프로덕트에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앞서 비즈니스 모델의 검증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저희 아이디어를 세상에 꺼내 놓으려다 보니 잘 정돈되고 멋진 프로덕트가 처음부터 있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죠. 그런데 앤틀러 프로그램에 매주 가설을 세우고 테스트를 하고 교육을 받고 또 여러 사례를 보며 다시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검증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노코드에 대한 이해도도 낮았는데, 주변 개발자 출신의 창업가 분들께서 제안을 해 주셔서 초기 프로토 타입의 스포트라이트를 만들 수 있었고, 이것으로 지금까지 검증 과정을 해 냈죠.”
벤자민 호리 CSO 역시 “처음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플랫폼을 통해 탤런트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며 스포트라이트가 바탕으로 했던 가치와 목표로 했던 가설을 설명했다. 검증 대상은 그가 보유한 탤런트 네트워크를 대상으로, 방식은 설문조사 후 참여를 권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첫 2주간 참여한 탤런트들이 대략 50명 정도였고 이후 입소문을 통해 탤런트 풀이 500여명까지 늘어나며 예상을 넘어선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벤자민 호리 CSO는 “상업 촬영 시장에서 탤런트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정확히 반영한 덕분에 100%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냈다”며 말을 이어갔다.
“목적 자체가 탤런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장기 계약은 고려하지 않았고 우리에게도 사업성이 있지만, 탤런트들에게도 유리한 수익을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볼륨의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죠.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지불을 보장하는 안전한 계약과 약속된 작업 범위를 지켜준다면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를 통한 계약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공정성과 빠른 대금 지급, 계약서 기반의 촬영 기회 제공이 관건이었죠. 실제로 반응은 굉장히 긍정적이었어요. 부정적인 피드백이 전혀 없었죠. 물론 탤런트들은 너무 많지만 그에 비해 일거리는 한정적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계약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회의 평등은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스포트라이트는 상업 촬영 시장에 속한 또 다른 플레이어들을 위한 사업 확장을 고려하고 있다. 이를테면 포토그래퍼, 스타일리스트 등과 같은 직군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다. 클라이언트를 포함해 이미 플랫폼 검증 단계에서 확보한 네트워크 풀이 적지 않다. 이미 DB는 확보돼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초기 사업성 검증이 완료된 상황에서 당면한 과제는 플랫폼 고도화다. 최 대표는 “어렵게 모아놓은 모델 풀을 분류하고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찾기 쉽도록 하는 검색 고도화”라며 향후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성을 설명했다.
“현재는 열심히 개발하는 단계죠.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가치는 동일하게 가져가면서도 좀 더 잘 하기 위해 기술의 도움을 받는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검색 기능을 강화하거나 모델들의 활동 데이터를 분석해 섭외 가능성이 높은 순으로 추천하는 기능 등이죠. 현재도 500명 수준의 풀이기에 스크롤 몇 번이면 전체 모델을 살펴볼 수 있지만, 향후 몇 천명 몇 만명이 돼 버리면 쉽지 않아지니까요. 그렇게 규모가 커져도 원하는 조건의 모델을 빠르고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해진 뒤에는 국가별로 타겟팅한 마케팅 전략을 진행하려 합니다.”
벤자민 호리 CSO 역시 “스포트라이트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업적 촬영 업계에 속한 클라이언트, 디자이너를 비롯해 제품 광고 소재를 제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찾고 소싱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고 강조하며 장기적으로 상품을 보내고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델을 비롯한 플레이어, 스튜디오를 연계해 촬영을 진행하는 방식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렇듯 다양한 가치를 담아 고도화된 스포트라이트 베타 서비스는 올해 안에 론칭을 목표로 하고 있다. 테스트 기간이 끝난 후, 내년부터는 한국을 넘어 동남아 시장부터 순차적으로 현지화 서비스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인터뷰 말미, 벤자민 호리 CSO는 “다음 세대는 현 세대가 겪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스포트라이트를 시작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최 대표 역시 “몇 세대에 걸쳐 반복적으로 일어난 문제를 스포트라이트가 최초로 해결하는 것이 목표”라며 남다른 각오를 내비쳤다.
“스포트라이트 플랫폼이 성장하며 이 산업이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 해결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상업 촬영 분야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라고 생각해요. 프로패셔널리즘이 충분하다면 인종을 비롯해 어떤 지향성이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포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