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인생을 산다면, 30년은 잠으로 소비한다. 삶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수면’은 단순한 휴식을 넘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인 것이다. 수면의 중요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 의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가 수면부족을 ‘선진국의 유행병’으로 선언한 것처럼, 많은 현대인은 숙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면에 대한 소비자의 급증하는 관심과 기술 발전에 힘입어 ‘슬립테크(SleepTech)’가 수면장애 해결사로 등장했다. 슬립테크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스타트업은 물론이고, 국내외 거대 기업이 본격적인 협쟁(協爭)을 시작한 가운데, 어떻게 고객의 수면경험을 높이고 있는지 살펴보고, 슬립테크가 개인의 삶과 비즈니스 전반에 걸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보자.
현대인은 양질의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수면 솔루션 기업 ‘레즈메드(ResMed)’가 12개국 2만여명 대상으로 한 조사(2023)에 따르면, 인구 80% 이상은 수면의 질이 떨어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수면부족 국가 중 하나인데, 수면시간이 6.9시간으로 12개국 평균(7.16시간) 대비 26분 정도 적다. 1년으로 치면 약 158시간의 수면 빚을 지는 것과 같다. ‘수면의 양과 질에 불만족한다’는 우리나라 응답자는 각각 50%, 55%로 평균치(35%, 37%)보다 훨씬 높았다. 실제로 해마다 불면증, 수면무호흡증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수면장애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5년 사이에 25만 명(30%) 늘어났다.
숙면을 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깨어 있을 때 쌓인 뇌 속 노폐물이 깊은 수면 중에 배출되기 때문이다. 양질의 수면이 부족하면, 기억력, 집중력, 창의력, 의사결정 능력과 같은 인지기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우울, 치매 등 만성질환을 유발한다. 실제로 24시간 깨어 있다면, 면허 취소 수준의 음주 상태인 혈중알코올농도 0.1%과 같다.
수면 부족은 개인 건강뿐 아니라 조직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미국에서 가장 큰 심리학회 APA PsycNet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피로나 졸음으로 생산성이 4.5~6% 떨어지고, 노동인구 1인당 손실비용이 연간 2,516달러(약 330만원) 든다고 추정한다. 즉 출근은 했지만 육체·정신적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여 성과가 떨어지는 영혼 없는 출근,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을 유발하는 것이다.
게다가 리더의 수면 부족은 조직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맥킨지(Mckinsey)에 따르면, 불충분한 수면은 문제해결 능력을 떨어트리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 리더의 시선을 좁아지게 만든다. 게다가 구성원의 감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게 하거나, 스스로의 감정도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출하게 해 구성원의 업무 몰입을 방해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수면이 삶의 질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확장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슬립테크가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슬립테크(SleepTech)란, 잠(sleep)과 기술(tech)의 합성어로 AI, 빅데이터, IoT 등 IT 기술로 수면 상태를 진단·분석해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산업 분야다.
미국 국립수면재단(National Sleep Foundation, NSF)에서는 슬립테크를 ‘고도화된 수면 과학과 기술을 활용해 기존 수면관련 의약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격차를 메우는 건강관리 카테고리’라고 정의한 바 있다.
기술로 수면문제를 해결하려는 슬립테크 시장 규모는 가파르게 성장할 전망이다. 시장조사 기업 글로벌마켓인사이트(Global Market Insights)에 따르면, 글로벌 슬립테크 시장 규모는 2021년 150억 달러(약 20조원)에서 2026년 321억 달러(약 45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 Source: 글로벌마켓인사이트
슬립테크 시장을 선도하는 스타트업들은 매트리스, 베개와 같은 침구류는 물론, 온도, 소리, 조명, 향 등 수면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환경에 기술을 접목해 고객의 수면경험을 탈바꿈하고 있다. 수면 분석부터 진단, 개인 맞춤 솔루션까지 어떻게 최적의 수면경험을 제공하고 있을까? 슬립테크 제품·서비스를 신체에 착용하는 ‘웨어러블(Wearable)’과 근처에 두는 것만으로도 수면을 측정할 수 있는 ‘니어러블(Nearable)’로 분류해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웨어러블 제품·서비스
핀란드 스타트업, ‘오라(Oura Health Oy)’는 손가락에 끼는 수면추적 반지를 개발했다. 반지는 사용자의 움직임, 온도, 심박수, 호흡수 등 생체 신호 데이터를 활용하여 수면 패턴을 심층 분석한다. 여기에 총 수면시간, 수면효율(밤에 자는 시간의 비율), 대기시간(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 등 데이터를 종합해 수면의 질을 측정한다.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사용자의 생체시계를 진단하는 것인데, 90일 간의 데이터가 쌓이면 종달새형과 올빼미형을 포함해 총 6가지 크로노타입 중 무엇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다. 타입에 따라 최적의 기상 및 수면시간을 추천해주고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지침을 안내한다.
데이터 기반 생체시계 진단 결과 6가지 크로노타입 (Source: 오라 홈페이지)
헤어밴드처럼 머리에 착용해 수면의 질을 높이는 슬립테크 제품을 선보인 기업도 있다. 베트남 스타트업 ‘이어러블 뉴로사이언스(Earable Neuroscience)’의 브레인밴드는 AI가 뇌 신호, 안구 운동, 안면 근육, 다중 바이오피드백 등을 모니터링한다. 그리고 제품에 달린 골전도 스피커를 통해 맞춤형 오디오 콘텐츠를 큐레이팅하여 들려줌으로써 최대 56% 더 빨리 잠들도록 유도한다.
알람은 사용자가 설정해 둔 시간 내에 덜 피곤하게 깰 수 있는 최적의 시간에 울리기 때문에 더 상쾌한 기상 경험을 제공한다. 해당 기술로 세계 최대 IT 가전·전시회 CES 2023 웨어러블 기술 기기 부문에서 베트남 기업 최초로 혁신상을 수상한 바 있다.
뇌파를 활용하는 브레인밴드 (Source: 이어러블 뉴로사이언스 홈페이지)
올해 5월, 수면 무호흡증 자가진단 장치로 미국 FDA 승인을 받으면서 슬립테크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기업이 있다. 바로 2016년에 설립된 영국 스타트업, ‘아큐러블(Acurable)’이다. 수면 무호흡증은 자다가 기도가 완전히 막혀서 일시적으로 숨이 멎는 질환인데, 수면 방해, 만성피로, 졸음, 나아가 심혈관 질환 등을 유발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모니터링과 관리가 중요하다.
사용자가 작은 진단 장치를 목에 붙이고 자면, 장치 내 초소형 마이크가 호흡 데이터를 수집하고 특정 음향 신호를 포착해 자동화된 진단을 내린다. 진단 결과와 데이터는 의사에게 전송돼 추가적인 검토가 가능하다. 기존에는 해당 질환을 검사하려면 병원에 직접 방문해 15개 이상의 유선 센서를 달고 자야 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 집에서 훨씬 간단하고 편한 방식으로 진단 및 관리할 수 있다.
폐쇄성 수면 무호흡증 자가 진단 기기 (Source: 아큐러블 홈페이지)
니어러블 제품·서비스
숙면을 방해하는 코골이를 줄이는 스마트 베개들도 출시되고 있다. 그 중 국내 스타트업 ‘텐마인즈’의 모션필로우는 CES에서 3회 연속 혁신상을 받으면서 이목을 끌었다. 베개 속 인공지능이 코 고는 소리와 머리 위치를 감지하고, 에어백을 부풀려 머리 위치를 살짝 바꿔준다. 기도를 확보해서 코골이를 줄이는 원리다. 앱에서 수면 상태, 코골이 소리 등 수면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고, 가족 구성원과 공유할 수 있어 서로의 건강을 챙길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다.
수면의 질을 높이는 방법으로 ‘빛’에 주목한 기업도 있다. 삼성전자 사내벤처 프로그램에서 스핀오프한 스타트업 ‘루플(Luple)’은 빛과 조명이 생체시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착안해 라이트 테라피 기술을 개발했다. 특정 빛 파장으로 밤에는 수면에 필요한 멜라토닌 분비를 유도하고, 낮에는 집중에 필요한 세로토닌 분비를 유도해 커피 한 잔과 같은 각성효과를 준다.
특히 기상조건이나 업무 환경 상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실내 근로자, 학생, 교대 근무자 등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사람마다 숙면을 위한 최적의 조도가 다르므로, 향후 루플은 빛과 수면에 대한 개인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수 파장으로 숙면 돕는 AIoT (Source: 루플 홈페이지)
슬립테크로 수면장애를 직접 치료할 수 있을까? 영국에서 수면제 대안으로 공식 권고한 불면증 디지털 치료제가 있다. 2010년 설립된 영국 스타트업, ‘빅헬스(Big Health)’가 개발한 디지털 인지행동치료(dCBT) 프로그램, ‘슬립피오(Sleepio)’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활용한 완전히 자동화된 치료로, 사람은 전혀 개입하지 않는 최초의 불면증 디지털 치료 앱이다. 이 앱은 수면 검사, 수면패턴에 대한 일지 분석, 주간 대화 등을 진행하면서 6주간의 치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