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의 진화와 함께 최근 몇 년 사이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을 통해 이른바 ‘K-culture’로 일컬어지는 한국 콘텐츠의 영향력은 위상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의 문화 전반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도 역시 높아지는 상황이다. 이는 최근 화제가 된 몇몇 숏폼 콘텐츠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일명 ‘공중부양 춤’ ‘초전도체 춤’으로 화제를 모으며 닷새만에 SNS 조회수 2억뷰를 돌파한 한국 중학생의 ‘슬릭백(Slickback)’ 영상은 단 9초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국내를 넘어 전세계에 슬릭백 챌린지 열풍을 불러왔다. 춤을 춘 중학생 이효철 군이 이 영상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수천달러가 넘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음식 블로거로 활동하는 재미 한인 세라안 씨와 그의 어머니가 지난 8월 16일에 틱톡에 올린 ‘김밥 먹방’ 영상은 20일만에 조회수 1100만회를 기록했다. 놀라운 것은 이 영상이 단지 SNS에서만 화제가 된 것이 아니라 미국 내 한국 김밥 열풍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미국 최대 식료품 체인 중 하나인 ‘트레이더조’의 전국 560여 매장에 납품된 ‘한국식 냉동김밥’은 한 달도 되지 않아 품절 대란을 일으키며 완판됐고, 이는 미국은 물론 한국 언론에서도 주목할 정도로 화제가 됐다.
각각의 사례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방송 등 미디어를 중심으로 콘텐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명확하게 구분됐던 과거와 다른 양상이다. 플랫폼 기반의 새로운 콘텐츠 생태계에서는 소비자와 이용자의 경계는 사라지고 통합되고 있으며, 스타가 아닌 평범한 개인이 새로운 생산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생산해 내는 창작물(글, 사진, 영상, 이모티콘, 웹툰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며 ‘크리에이티브 경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에 지난 22일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매월 진행하는 굿인터넷클럽은 88회 주제를 ‘새로운 생산자가 나타났다’로 잡고 학계와 틱톡, 아프리카TV 관계자들이 모여 성장하고 있는 ‘크리에이터 생태계의 현황과 건전한 성장을 위한 조건 등을 짚었다.
새롭게 등장한 경제 주제, 크리에이터가 만들어 낸 변화
이날 굿인터넷클럽은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진행을 맡고 홍현우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를 비롯해 정재훈 틱톡코리아 운영총괄, 한맛비 아프리카TV 팀장이 패널로 참석했다.
박 교수는 “최근 시장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구들이 등장하면서 플랫폼의 성장과 함께 새로운 생산자들이 등장하고 있다”며 패널들에게 그 배경을 질문했다.
이에 홍 교수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등장하며 단면 시장으로 구성됐던 기존 기업 생태계가 양면 시장으로 바뀌었다”며 이로 인해 이어지는 변화를 언급했다.
“플랫폼이 가지는 경제학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경제 생태계의 등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경제 생태계가 등장하면 사회에 가용한 자원들이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는 한 사회의 생산성 변화는 물론 부의 재분배 등 여러 가지 변화를 수반하죠. 앞서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플랫폼 기반의 생태계는 기존 보다 훨씬 더 생활 깊숙이 침투했습니다. 그 사이 플랫폼 기반 시장 규모는 50% 가까운 성장을 이어갔죠. 이와 같은 성장은 이른바 ‘플랫폼 노동자’의 급증으로 이어졌고 많은 긍정적, 부정적인 이슈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격변의 상황은 콘텐츠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플랫폼은 소비자와 생산자를 이어주는 공간을 넘어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는 공간이 됐다. 이렇게 새로이 등장한 크리에이터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창작물을 만들어 내고 수익을 창출하며 ‘크리에이터 경제’를 구축하고 있다. 홍 교수는 맥킨지 보고서를 인용해 이와 같은 현상을 설명했다.
“맥킨지 보고서에서 이야기하는 ‘경제 변화 3단계’의 첫 번째는 생산자 경제였어요. 기업이 주체였죠. 이어 대량 생산 시대에 접어들며 생산 효율성만을 중시하던 관점이 소비자로 이동했습니다. 이것이 ‘콘슈머 이코노미(소비자 경제)’ 시대였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변화는 앞서 두 변화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하는 새로운 경제 주체, 크리에이터가 등장한 거죠. 이들은 단순히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하는 것을 넘어 좀 더 근본적인 가치를 창출했어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기존의 시장 경제에서 생산되거나 소비될 수 없었던 것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죠. 누구의 지시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가 정말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할 수 있고 그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수익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즉 ‘크리에이터 이코노미(크리에이터 경제)’는 이들이 이끌어 가는 경제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경제의 건전한 성장을 위한 플랫폼의 역할은?
박 교수는 이어 “현재 크리에이터로 정의된 인구가 세계적으로 3억명이상”이라며 크리에이터 경제의 바탕이 됐고, 향후에도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플랫폼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아프리카TV의 경우 한국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 플랫폼으로서 글로벌 플랫폼인 유튜브의 국내 진출 등에 따른 위기에 대응하며 경쟁력 제고를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그간 아프리카TV가 이어온 노력들을 설명한 한맛비 팀장은 “VJ(1인 미디어 진행자) 등급제, 큐레이션을 통해 건전한 크리에이터 경제를 만들면서도 수익을 제공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 왔다”며 말을 이어갔다.
“최근 롤챔스 등 대형 e스포츠 이벤트 중계권을 확보하며 저희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BJ 분들이 이와 관련해 다양한 콘셉트로 자체 방송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자체적으로 BJ 등급제를 시행하고 있죠. 이렇게 마련된 환경에서 VJ분들은 ‘별풍선’으로 불리는 수익을 창출하고 있고요. 그 외에 기업과 협업해 브랜디드 콘텐츠(유료광고)를 제작하는 수익이 적지 않습니다. 저희는 기업 쪽에 의뢰가 들어오면 해당 콘셉트와 맞는 VJ를 추천하고 콘텐츠 제작을 지원하죠. 특히 저희 VJ분들이 만드는 콘텐츠를 폐쇄적으로 제한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프리카TV에서 활동하는 분들 자체가 저희 플랫폼에만 채널을 가진 것이 아니니까요. 저희 플랫폼은 ‘라이브’를 기본으로 하고 이 콘텐츠를 바탕으로 편집해 유튜브 등 다른 서브 채널을 통해 확산을 하고 있죠.”
숏폼 동영상을 무기로 차별적인 크리에이터 생태계를 구축하며 단기간에 글로벌 플랫폼으로 등극한 틱톡의 경우는 어떨까? 앞서 언급된 한국 냉동 김밥 먹방, 슬릭백 챌린지 등이 가장 활발하게 이어지는 플랫폼 역시 틱톡이다. 이날 함께 자리한 정재훈 틱톡코리아 운영총괄은 “이달 초 부산시와 함께한 ‘월드 크리에이터 페스티벌’에 화제가 된 냉동 김밥 먹방 영상을 만든 세라안을 초청하기도 했다”고 말하며 틱톡 콘텐츠의 특성을 설명했다.
“틱톡은 콘텐츠 하나로 미국 사람들이 냉동 김밥을 알게 되고 마트에서 품절 대란을 일으킬 정도로 문화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숏폼 콘텐츠라는 것은 단순히 길이의 짧음 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에요. 주목할 것은 이 영상의 수행하는 역할이죠. 과거에 영상이라는 것은 굉장히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었어요. 하지만 숏폼이 등장하며 틱톡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됐죠. 그것이 엄청난 확산력을 발휘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해요. 초기 틱톡은 영상을 쉽게 제작하는 플랫폼으로서 역할을 했고, 이 숏폼 콘텐츠로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하고 트렌드를 만들고 있는 거죠.”
이어 정 총괄은 “틱톡이 숏폼 콘텐츠를 쉽게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 크리에이터 경제와 생태계 확대에 일조하고 있다”며 말을 이어갔다.
“틱톡에는 모든 셋팅을 미리 갖춰 놓고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넣어 따라하기만 하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영상을 제작하는 기능들이 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필터’라고 불리는 이 기능을 만드는 크리레이터도 존재한다는 점이죠. 어떤 유행이 일어나면 그 유행을 반영한 필터를 만들어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끔 하는 거예요. 다양한 창작자가 등장하는 거죠. 이러한 크리에이터를 위해 틱톡은 크리에이터와 수익을 나누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높은 퀄리티의 콘텐츠를 만들어 판매를 할 수도 있고, 기업 브랜드의 스폰서십을 받는 수익도 적지 않죠.”
한편 이날 굿인터넷클럽에서는 플랫폼 기반의 신산업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대한 주제도 다뤄졌다.
이와 관련 홍현우 교수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부분에서 예측할 수 없는 범위와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플랫폼 기반의 신산업”이라며,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래의 흐름을 받아들이려는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기존의 프레임을 가지고 새로운 경제 체제를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재훈 틱톡코리아 운영총괄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생태계의 안착을 위해 크리에이터 에듀케이션・인큐베이션・앰플리피케이션(홍보)・머니타이제이션(수익화) 등 다양한 분야를 운영하고 있다”며 “영상 제작을 쉽고 빠르게 하기 위한 이펙트(필터) 생산부터 청소년 사용자 계정에 스크린 타임 제한 적용까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건전한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맛비 아프리카TV 팀장은 “향후에도 크리에이터는 소비자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며 정보를 알려주는 수단이자 팬덤까지 형성하게 하는 강력한 존재가 될 것”이라며 “크리에이터를 운영관리 할 수 있는 조직이나 기관이 필요하며, 크리에이터의 수익 보장을 위해 플랫폼과 협업하여 명확하고 정당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