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을 찾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수는 3만명(2022년 기준 3만300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새터민 혹은 통일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의 남한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해 새 삶을 시도했지만, 치열한 경쟁 사회인 남한에 적응하는 것은 이들에게 또 다른 문제다. 이들의 힘겨움은 의외의 수치에서도 엿볼 수 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이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이들 탈북자의 자살률은 3배가 더 높다.
그러나 이렇듯 어두운 이면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개중에는 사선을 넘나든 용기를 바탕으로 창업의 바다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다.
지난 3일 아산나눔재단의 창업가 플랫폼인 ‘마루 180’에서 모습을 들어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이날 개최된 ‘아산상회 5기 데모데이’는 아산나눔재단이 ‘통일한국의 비즈니스를 주도할 북한이탈 창업가들의 성장을 돕는다’는 취지로 운영하는 포용적 창업지원 프로그램을 거친 창업 팀들이 투자 유치를 위한 IR을 진행하는 행사였다.
‘아산상회’라는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아산 정주영 회장의 호인 ‘아산(峨山)’과 그가 생전 처음으로 창업한 ‘경일상회’의 합성어로 북한이탈 청년 창업가가 기업가정신을 함양하고 창업을 통해 자립 및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지난 2019년부터 시작됐다. 이후 1기부터 5기까지 총 39개의 창업팀을 배출했으며, 이번 5기에서는 실제 투자자를 대상으로 기업 설명과 홍보를 진행하는 ‘데모데이’를 최초로 선보였다.
정밀 멘토링과 피칭 교육으로 채워진 7개월 간의 창업 인큐베이팅
아산상회 5기에 최종 선발된 9개의 창업팀은 모두 탈북 창업가 리더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개인 단위의 지원자를 선발한 후 하나의 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두었던 지난 기수와 달리, 올해는 탈북 청년을 중심으로 구성된 ‘팀 단위’로 선발해 사업 성장 과정을 집중 지원했다는 것이 아산나눔재단의 설명이다.
이들은 지난 4월 선발된 후 이달까지 전문가 멘토링, 피칭 교육 등으로 구성된 전략적인 창업 인큐베이팅 과정을 거치며 비즈니스 모델을 고도화하고, 지난 3일 마루180에서 열린 데모데이 무대에 올랐다.
피칭 세션 후 열린 시상식에서 대상의 영예는 B2B 전용 중국 제조상품의 신뢰성 검증 플랫폼인 ‘이젠케어’를 개발한 ‘메리’에게 돌아갔다. 최우수상은 ‘프로리 솔루션’과 ‘박스레더’ 등 2팀에게, 우수상은 ‘하나도가’ ‘포레거시’ ‘삼수령목장테마공원’ ‘OTT F&B’ ‘문화잇수다’ ‘우묘’ 등 6팀에게 수여됐다. 대상팀에게는 1000만원, 최우수상과 우수상 팀에게는 각각 500만원과 300만원의 상금이 지급됐다.
아산나눔재단은 수상팀에게는 후속 투자 연계와 함께, 투자를 유치한 창업팀을 대상으로 매칭그랜트 방식의 지원금도 수여할 예정이다.
표정도 말투도 서툴었지만, 그래서 더욱 빛난 ‘진정성’
이날 데모데이는 ‘OTT F&B’의 이정혁 대표가 첫 발표에 나섰다. 외식 프랜차이즈 ‘셀프스테이크스테이션’을 선보인 ‘OTT F&B’의 차별점은 ‘매장을 방문한 고객이 직접 스테이크를 구워먹게 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스테이크 요리의 비용 부담을 낮춰 대중성을 확보하며 직접 요리하는 재미를 느끼게 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다. 긴장한 표정의 이 대표가 “여러분은 언제 행복을 느끼십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발표를 시작했다.
“행복에 다양한 모습이 있겠지만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맛이라는 것은 시각, 후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 기관을 통해 느껴지는 복합적인 자극의 결과입니다. 심지어는 경험까지도 맛에 지대한 영향을 주곤 합니다. 저희는 5가지 감각 기관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즐거운 경험까지 함께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음식으로 외식 문화의 트렌드를 만들고 그 시장을 선점하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테이크를 좋아하지만, 가격 부담에 자주 즐길 수는 없다’, 이 대표가 세운 가설은 실제 설문조사 등의 시장 분석 과정에서도 그대로 들어 맞았다. 직접 구입해 집에서 조리를 해 먹는다고 해도 연기와 냄새, 식사 후 뒷정리까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OTT F&B’의 ‘셀프스테이크스테이션’은 그런 페인포인트에 주목해 개발됐다. 매장에서 고객이 직접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도록 한 고기집의 장점을 적용해 고가의 스테이크 비용을 낮추고, ‘도심에서 즐기는 캠핑’의 감성을 더한 것이다. 여기에 이 대표는 매장 오픈 비용을 최소화해 진입 장벽을 낮추고,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일자리에 노출된 탈북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목표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날 대상을 차지한 ‘메리’의 박영미 대표의 발표도 빼 놓을 수 없다. 박 대표는 능숙한 중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국내 모 가정 브랜드사의 중국 법인 팀장으로 근무하며 중국 공장 제품의 물류, 출하, 풀질관리 등을 두루 섭렵한 바 있다. 그런 경험 끝에 박 대표가 주목한 페인포인트는 중국 제품의 신뢰도가 낮다는 것이었다. B2B 전용 중국 제조상품의 신뢰성 검증 플랫폼 ‘이젠케어’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저희 이젠케어는 중국 현지에 자사 직원을 둘 수 없는 국내 유통사 대표님들의 가장 큰 페인 포인트인 품질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 업무를 담당하는 구매 대행사들에 품질 관리 시스템이 없기 때문인데요. 이들은 소싱 단계에서 기본적인 제조사의 퀄리티 검토는 물론 현장 실사조차 없이 제품을 바로 발주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출하단계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기능 검사는 물론 외관 검사 조차 하지 않았죠. 결과적으로 후속 A/S도 기대하기 힘들고 판매 후 불량에 대한 비용 손실은 고스란히 유통사의 몫이 돼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젠케어’는 데이터 기반의 서비스를 선보이며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소싱 단계에서부터 선호도가 높은 제품만을 선택해 제안하고, 유통사들로부터 해당 제품의 구매 의향을 확인한 후에는 100개의평가 문항을 가지고 현장 실사를 진행한다. 제품 출하 시에도 직접 방문해 기능 및 외관을 확인하는데, 이때에는 국제 품질 기준을 적용해 합격한 제품만 출하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메리’는 샘플 구매 수수료와 대량 구매 발주 시 관리 비용을 수익 모델로 삼고 있다. 2021년 ‘이젠케어’ 플랫폼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누적 4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메리’는 친환경 분야 등으로 품목을 확장 등을 통해 오는 2026년 매출 1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임산부의 몸으로 나선 문화 콘텐츠 사업 피칭, 온라인 추모 플랫폼도 주목 받아
독창적인 창작 문화예술컨텐츠 사업을 소개한 김봄희 ‘문화잇수다’ 대표의 발표도 주목을 받았다. 5개월로 접어든 둘째아이를 임신한 상황에서 발표에 나선 김 대표는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남다른 활동을 이어가는 문화예술인이다. 놀라운 점은 ‘문화잇수다’가 ‘아산상회’의 인큐베이팅을 통해 선보인 첫 공연 관객이 무려 1000명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문화잇수다’가 제시한 것은 ‘다름’과 ‘포용’을 주제한 문화예술컨텐츠를 통해 초·중등생을 대상으로 통일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는 통일교육법 제8조에 의거해 전국 초중학교에서 통일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며 말을 이어갔다.
“대부분의 교육은 분단의 원인을 동영상으로 시청하는 것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의 38.7%만이 북한을 협력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뮤지컬 공연은 2500건이 달하고 매출액도 670억이 넘지만 정작 남북 평화와 통일을 주제로 다룬 작품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죠. 이에 저희는 창작 문화예술 콘텐츠, 뮤지컬을 기획 제작해 선보이는 일을 진행해 왔습니다.”
‘문화잇수다’는 2025년까지 지속적인 교육 콘텐츠 사업으로 약 150회의 공연을 준비 중이다. 그 과정에서 창작 콘텐츠의 지적재산권은 꾸준히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 남다른 경쟁력이다.
AI 기술을 적용한 온라인 추모 플랫폼을 선보인 ‘포레거시’ 강은혜 대표의 발표 역시 많은 이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차 베이비붐 세대가 모두 60대로 접어든 지금, 우리나라는 10년 이내에 이른바 ‘메가데스(Mega-Death)’ 시대가 예견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현재의 납골 방식의 장례 문화도 공간 부족 사태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이에 정부는 오는 2027년까지 산골장(散骨葬, 화장한 유골을 시설물 없이 산 등의 자연에 뿌리는 장법) 비율을 30%까지 올리겠다는 방침을 밝힌 상황이다. 그러나 산골장은 지금과 같은 묘비나 표식 등을 설치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즉, 앞으로는 고인을 추모할 물리적인 공간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강 대표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포레거시는 크게 기억과 소통, 두 가지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먼저 기억은 고인의 삶을 4가지의 콘텐츠를 통해 온라인에 담아드립니다. 그리고 UI와 UX의 경우 고객의 특징에 맞게 유족이 직접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각 콘텐츠는 인생에서 중요했던 순간들을 이야기로 남기며 고인의 사진 역시 단순히 저장을 하는 것을 넘어 데이터베이스로 구조화해 기록하게 됩니다. 또 고인이 여러 명일 경우 한 공간에서 확인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다음은 소통입니다. 소통은 포레거시의 강점인데요. AI 휴먼 콘텐츠를 통해 ‘종이 비행기’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요. AI 휴먼을 통해 고인의 생전 모습을 재현한 영상 편지를 받을 수 있게 한 기능입니다.”
이 외에도 이날 ‘아산상회 5기 데모데이’는 6차 산업화 전략을 담은 ‘무무공간’과 커머스 브랜드 ‘무무곳간’을 소개한 ‘삼수령목장테마공원’의 박요셉 대표의 발표를 비롯해 북한 전통가양주제조 및 유통 사업을 소개한 ‘하나도가’의 김성희 대표, AI/빅데이터 기반 스타트업-해외 전문가 매칭 플랫폼’을 선보인 ‘박스레더’ 최철만 대표, 전통적인 한복 기반 라이프스타일 패션 브랜드를 선보인 ‘우묘’의 김세나 대표, 재활 전문가들을 위한 통합형 재활 교육 플래폼을 선보인 ‘프로리 솔루션’의 박유경 대표의 발표가 이어지며 열기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