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음 meeting까지 각자 brainstorming 하시죠. 그땐 서로 R&R 정해서 develop 해봅시다. 내부에서 꽤 중점적으로 보고 있는 critical 한 이슈이니 잘 좀 care 부탁드리고 detail한건 실무자 contact 해주세요. 저는 CC 넣어서 forwarding 바랍니다"
중간중간 영어로 된 키워드가 섞여있기는 하지만 잘 이해되시죠? 아, 평소 이런 말을 쓰지 않으신다면 불편하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시는 분들을 정말이지 너무 많이 봤습니다. 저도 은근히 저렇게 쓰기도 하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저런 식으로 대화합니다. 지방에서 쓰는 방언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어권 나라에서 쓰는 말도 아닌, '판교(식) 사투리'라고 하는데 이것보다 심한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Assign 되지 않은 Issue가 있으면 안 됩니다. To-do action이 있는 모든 issue는 action 수행해야 하는 실무에게 Assign 되어야 하고 Due date는 명확하지 않더라도 지정해서 주세요. 그리고 Dashboard에서 monitoring 부탁드립니다"
이것도 뭐 크게 복잡하거나 어렵진 않으시죠? 하지만 이 정도의 말도 종종 쓰이곤 합니다. 아니 왜 굳이, 좋은 한글 놔두고 이렇게 영문 키워드를 활용하고 있을까요? 완벽하게 한국어 어순이지만 중간중간 한글 키워드가 아닌 영어 단어를 섞어서 씁니다. 사실 테헤란로를 넘어 판교 일대에 테크노밸리가 생기고 이곳에서 뿌리박은 IT 및 개발 회사들이 활활 타오르면서 이런 식의 말투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IT 기업이나 판교 소재 회사가 아니어도 '디폴트', '아삽(ASAP)', '니즈(needs)' 같은 키워드도 많이 사용되고 있잖아요? 카카오를 포함한 일부 회사들은 멀쩡한 한글 이름이 있는데 자신의 이름 대신 영어로 된 호칭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뭔가 되게 트렌디한 것처럼 보이는데 또 어떻게 보면 애매한 영미식 기업 문화라고 합니다.
일부 기업들이 이런 호칭을 쓰니 30년 즈음 회사를 다니신 어느 임원분이 '아니 멀쩡한 한글 이름 두고 대체 왜 영어 이름을 쓰는 거야'라면서 혀를 끌끌 차셨답니다. 글쎄요. 사장(대표이사), 전무에서 저 밑에 대리, 주임까지 쭉 이어지고 있는 직급 체계가 완벽하게 자리한 곳에서 일하다 보면 사실 저런 호칭이 부러울 때가 있기도 합니다. 직급 체계가 아닌 직급 파괴는 자유로운 브레인스토밍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나, 뭐라나. 판교 사투리를 찾아보면, 여기서도 그렇게 표현합니다. 'MZ세대 담론에서 보이는 자기애와 자존감 넘쳐나는 근로 행태가 포함된다'라고 말이죠.
트렌드고 자기 애고, 한글과 영어를 교묘하게 믹스한 표현들이 익숙해져버리면 '오, 꽤 편한데?'라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저런 류의 커뮤니케이션이 자리 잡고 시간이 흐르게 되면 이걸 또 한글 표현으로 바꾸기도 애매해질 수 있습니다. 바꾸려다 보면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오히려 어색해질 수 있다는 거죠. 그만큼 점점 더 뿌리박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어떤 단어를 쓰든 나와 상대방이 보다 원활한 소통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보다 편한 것도 없을 것 같긴 합니다. 결국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굉장히 아이러니하면서도 새롭게 탄생해버린 한영믹스의 돌연변이 콩글리쉬인거죠. 이 또한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낸 소통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