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요약] 최근 한국인 대표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두고 업계에서는 모토로라의 한국 재진출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모토로라의 한국 시장 재진출은 2011년 사실상 철수 후 만 10년 만이 일이다. 모바일 산업 초기 모토로라의 성공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실패의 역사도 이미 많은 이들에게 각인돼 있다. 1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모토로라의 빛났던 과거, 몰락의 과정, 그리고 현재의 경쟁력을 진단해봤다.
최근 김윤호 한국레노버 대표가 모토로라코리아의 대표이사를 겸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한국인 대표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두고 업계에서는 모토로라의 한국 재진출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모토로라가 올해 하반기 국립전파연구원으로부터 5G 이동통신 스마트폰 인증을 마쳤다는 것이다. 인증 받은 모델은 ‘모토G 50’ ‘모토로라 엣지20’ 등 두 가지다. 업계에서는 전파인증까지 마친 상황에서 모토로라의 국내 시장 제품 출시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고 있다.
모토로라의 한국 시장 재진출은 2011년 사실상 철수 후 만 10년 만이 일이다. 모바일 산업 초기 모토로라의 성공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실패의 역사도 이미 많은 이들에게 각인돼 있다.
1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모토로라의 빛났던 과거, 몰락의 과정, 그리고 현재의 경쟁력을 진단해봤다.
모토로라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그 모태는 1928년 폴 갈빈과 조셉 갈빈 형제에 의해 설립된 갈빈제조회사다. 첫 제품은 당시만 해도 엄청난 크기였던 라디오를 가정용 전기로 사용할 수 있는 정류기였다. 이후 1930년대에는 최초의 차량용 무전기를 개발하며 비로소 ‘모토로라’라는 상표를 쓰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회사명이 모토로라로 변경된 것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947년의 일이다.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모토로라는 군사 통신의 혁신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휴대용 무선통신기기인 핸디토키(Handie-Talkie)를 개발했다. ‘워키토키’로 더 잘 알려진 이 장비는 연합군 승리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모토로라가 무선통신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모토로라의 트레이드 마크인 ‘M’자 디자인은 1955년 디자이너 제키 지너에 의해 고안됐다. 모토로라의 ‘최초’ 행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우리나라에는 한참 뒤에 보급됐던 ‘삐삐’는 1956년 모토로라가 처음 세상에 내 놓은 것이었다.
이후 모토로라는 1960년에 최초의 무선 휴대용 TV, 1963년 최초의 직각 컬러 브라운관을 연이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 TV 기술은 1974년 일본 파나소닉에 매각돼 일본 가전 부문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계기가 됐다.
1973년 최초로 휴대폰을 개발한 것도 모토로라였다. 이후 개발과정을 거쳐 1983년 최초의 상업용 휴대전화인 ‘모토로라 다이나텍 8000X’가 등장했다. 이후 모토로라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반도체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뒀고, 1990년대 이후 무선통신 분야에서도 지속적인 혁신을 이어갔다. 1996년 피처폰인 마이크로택의 후속으로 내놓은 스타택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모토로라는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삼성, LG, 현대 등이 내 놓은 휴대전화에 비해 세련되고 슬립한 디자인이 주목 받으며 큰 인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모토로라의 실패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모바일 분야에 엄청난 성공에 도취돼 통신 위성을 사용해 세계 어디든 통화를 할 수 있게 한다는 꿈의 휴대폰 개발 계획인 ‘이리듐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수년을 공들인 이 프로젝트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닷컴 버블이 꺼지고, 미국에서는 9·11테러가 발생하며 세계 경제는 침체 일로에 접어들었다. 모토로라도 위기에 직면했다. 그나마 토로라의 자존심을 지켰던 것은 2004년 출시된 폴더블폰 ‘레이저(RAZR)’였다. 하지만 이는 모토로라의 마지막 성공이 됐다. 모바일이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전환되는 시대적 변화를 놓친 것이다.
모토로라의 사세는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하며 급전직하했다. 업계의 판도가 뒤바뀌며 모토로라와 1, 2위를 다투던 노키아 역시 이 무렵 기세가 꺾였다. 결국 휴대폰 업계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한 모토로라의 휴대폰 부문은 2012년 구글에 매각됐다. 하지만 구글은 인터넷 기업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휴대폰 제조 부문에 전문성이 떨어진 구글에게 모토로라는 곧 애물단지가 됐다.
결국 모토로라는 구글에 인수된지 2년만인 2014년, 중국계 기업인 레노버로 넘어갔다. 구글은 모토로라의 지적재산권(IP)를 제외한 IP사용권, 브랜드, 생산설비, 인력 등을 레노버에 매각했다.
비록 중국계 기업이지만 레노버는 IBM을 인수해 세계 최대 PC 제조업체로 성장시키며 글로벌 기업으로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터였다. 비록 과거의 영광이 빛 바래긴 했지만, 휴대전화의 원조 기업인 모토로라를 인수한 이후 레노버는 글로벌 시장을 제패하겠다는 야심까지 내비쳤다.
하지만 레노버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레노버에 인수된 이후 모토로라는 더욱 침체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모토로라 인수 직후 순이익 8억달러를 기록했던 레노버는 이듬해와 2016년 1억 2800만 달러(약 1514억원)의 손실을 냈다. 기세등등하던 레노버의 실적을 끌어내린 것은 4억 6900만 달러(약 5550억원) 손실을 기록한 모토로라의 모바일 사업이었다.
업계에서는 레노버가 모토로라의 정체성을 무리하게 바꿔가며 시장 접근 방식을 달리한 것을 패착으로 봤다. 대표적인 것이 레노버 인수 이후 모토로라가 도입한 중저가 스마트폰 전략이다. 당시 모토로라는 “경쟁 플래그십 스마트폰보다 200~300달러 저렴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마케팅을 진행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업계에서는 모토로라 인수 이수 구글, 레노버 등의 연이은 실패를 두고 ‘모토로라의 저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스마트폰으로 재편된 모바일 업계는 최근 삼성전자가 시작한 폴더블폰 전략으로 다시금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던 LG가 모바일 부문 사업 중단을 선언했고, 미·중간 무역 전쟁으로 화웨이 등 중국계 기업이 타격을 입으며 시장의 상황은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
이에 레노버는 모토로라의 마지막 히트작 레이저 모델의 향수를 자극하는 폴더블폰 ‘모토로라 레이저’로 다시금 삼성이 불 붙인 폴더블 스마트폰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조악한 품질로 시장의 외면을 받으며 또 한 번의 실패를 거뒀다.
모토로라를 두고 고민에 빠진 레노버의 선택은 LG가 빠진 한국 시장 재진출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모토로라 인수 초기 패착에서 교훈을 얻었다는 점이다.
당시 업계에서는 모토로라 인수 당시 레노버가 취한 전략을 두고 “IBM 인수에서 얻은 성공 모델을 적용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패로 이어졌다.
IBM PC 부문 인수 당시 레노버는 주요 경영진을 그대로 남기고 간섭을 하지 않는 방식을 적용해 기존 고객인 미국 내 입지를 유지했으며 한편으로 신흥시장 진출을 통해 IBM을 세계 1위 PC 제조업체로 키웠다.
이번 모토로라의 한국 재진출 상황도 과거 실수를 반면교사하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모토로라코리아 최초로 한국인 대표를 선임한 것이 그렇다. 김윤호 대표 선임 전까지 모토로라코리아 내 대표이사직은 없었다.
김 대표는 제품 마케팅과 솔루션 영업을 비롯한 어카운트 매니지먼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륜을 쌓았다. 한국 델 테크놀로지스와 한국 HP, 한국오라클을 거쳐 한국레노버를 맡으며 성과를 인정받기도 했다. 이를테면 외국계 기업의 한국 진출 전문가인 셈이다.
모토로라가 노리는 것은 올해 7월 스마트폰 사업을 중단한 LG의 빈자리이다. 업계에서는 LG의 사업 중단으로 인해 약 1조원 규모의 공백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실패를 교훈 삼은 레노버는 다시금 모토로라를 통한 글로벌 시장 공략에 시동을 걸고 있다. 올 3분기 중남미 시장에서 1위를 기록한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바로 뒤를 차지한 것이 점유율 23%의 모토로라다. 멕시코에서는 이미 2분기부터 삼성을 따돌리고 1위로 올라섰다.
어찌됐든 과거의 모토로라와 지금의 모토로라는 전혀 다르다. 아직 가시화되진 않았지만, 중국계 기업이 된 모토로라가 어떤 방식으로 한국 시장을 공략할지 그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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