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기점으로 악화된 스타트업 투자 환경은 해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때 ‘혹한기’로 불리던 스타트업 투자시장은 이미 2023년 무렵부터 ‘빙하기’에 접어들었다는 말까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실제 2024년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의 지속과 가자 전쟁의 확대에 따른 대외적 불확실성 지속됐다. 대내적으로는 연말 온 국민을 당황스럽게 한 정치적인 혼란까지 더해져 조금이나마 회복 조짐을 보이던 창업 생태계 투자 분위기를 꺾는 상황이 연출됐다.
지난달 30일 벤처기업협회가 발표한 ‘2024년 4분기 벤처기업 경기실사지수(BSI)’를 보면 올해 1분기 경지전망지수는 88.9를 기록, 전 분기 대비 21.8포인트 급락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급속도로 경기가 악화된 주요 원인으로는 내수판매 부진, 자금 문제, 인건비 상승 등이 언급됐다.
AI에 집중된 스타트업 대규모 투자
물론 이제 막 시작한 초기 스타트업의 경우 투자 유치 규모가 크지 않아 경기의 영향을 덜 받지만, 문제는 시리즈 B 이상의 스케일업에 나선 스타트업들이다. VC(벤처캐피탈)업계에서도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투자에 보다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다.
스타트업 투자가 위축될 당시에는 AI, 헬스케어 등 유망 분야를 중심으로 열렸던 VC의 지갑은 이제 유망 분야라 해도 ‘매출’과 같은 명확한 성과가 없을 경우 쉽사리 열리지 않는 모양새다.
특히 2024년 기준 AI 분야의 대규모 투자의 경우 AI 반도체 분야에서 지난해 1월 1650억원 규모의 시리즈 B 투자 유치에 성공한 스타트업 리벨리온, 1100억원 규모 투자를 유치한 온디바이스 AI 반도체 스타트업 딥엑스가 있다. 이어 LLM 전문 스타트업 업스테이지의 1000억원 규모 시리즈 B를 비롯해 270억원의 시리즈 B를 유치한 AI 검색 스타트업 라이너, 250억원의 프리 시리즈B를 유치한 AI 서비스 플랫폼 스타트업 뤼튼테크놀로지스 정도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AI 분야에서 차별적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국내외 시장에서 실질적인 매출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 분야에서는 지난 12월 AI 영어 학습 앱 ‘스픽’을 운영하는 스픽이지랩스가 1100억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 유치에 성공했으며 패션 커머스 플랫폼 기업 에이블리코퍼레이션이 알리바바그룹으로부터 1000억원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기도 했다.
한편 누적투자규모를 기준으로는 조금 다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더브이씨와 삼성증권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누적 투자규모가 큰 상위 10개 스타트업은 OTT 플랫폼 ‘웨이브’를 운영하는 콘텐츠웨이브(1위, 6551억원), 전기차 급속 충전 서비스 ‘워터’를 운영하는 브라이트에너지파트너스(2위, 4740억)을 비롯해 에이블코퍼레이션(2320억), 리벨리온(2970억), 한국신용데이터(2698억), 브이디에스(2500억), 베어로보틱스(2199억), 스픽이지랩스(2024억), 마이리얼트립(1980억), 스푼랩스(1870억) 등이다.
스타트업 생태계 분위기 ‘부정적으로 변해’
지난해 11월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오픈서베이와 함께 발표한 ‘스타트업 트렌드 리포트 2024’에 따르면 창업자·투자자 10명 중 6명(각각 63.2%, 64.0%)은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지난해(2023년) 대비 위축된 것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투자 유치/집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 역시 창업자 48.4%, 투자자 53.5%로 절반 수준에 달했다.
이같은 투자 시장 혹한기에 스타트업이 취해야 할 대책으로 창업자는 ‘매출 다각화 전략 마련(53.2%)’, ‘정부지원사업 등 추진(49.6%)’을 꼽은 반면, 투자자는 ‘수익성 개선을 위해 흑자 사업에 집중(60.0%)’, ‘기업 비용 절감(55.5%)’을 꼽았다. 창업자에 비해 투자자들은 투자 혹한기 리스크에 스타트업들이 더 보수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많은 창업자, 투자자가 지난해(2023년) 대비 스타트업 생태계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변화했다’고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리포트에 따르면 창업자의 64.8%, 투자자의 58.9%는 지난해(2023년) 대비 스타트업 생태계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변화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창업자, 투자자 대부분이 향후 스타트업 생태계 전망을 밝지 않게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업자의 82.4%, 투자자의 66.5%가 향후 1년 뒤 스타트업 생태계 분위기가 나아지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한편 창업자의 정부 역할 평가 점수는 54.6점으로 지난해 52.5점보다 소폭 상승했다. 정부가 시급하게 개선했으면 하는 과제로 작년에 이어 올해 역시 ‘생태계 기반 자금 확보 및 투자 활성화(29.2%)’ ‘각종 규제 완화(19.2%)’가 꼽혔다. 투자 활성화 관련 응답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인 반면, 규제 완화에 대한 요구는 지난해 대비 6%p 감소했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2025년 스타트업계
2025년 역시 불확실성은 지난해 못지 않다. 트럼프 2.0 시대를 맞아 관세를 비롯해 경제 여러 분야의 압박이 거세질 것이라는 점은 확실시 되고 있다. 이에 대응해야 하는 국내 상황은 정치적 혼란기가 지속되며 우려를 낳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를 중심으로 한 AI 기술 경쟁 역시 심화되며 AI 기술 생태계의 격변은 지속될 전망이다.
이러한 때에 스타트업계가 직면한 상황을 보면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모양새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는 ‘2025년 중앙부처 및 지자체 창업지원사업 통합공고’를 통해 정부와 지차체 포함 101개 기관의 429개 창업 지원 사업을 발표했다. 사업 내용을 보면 중앙 부처는 중기부 등 13개 부처에서 87개 사업에 3조 1190억원을 지원한다. 지자체의 경우는 서울시 등에서 88개 기관이 342개 사업을 통해 1750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정부는 2025년 모태펀드 출자 예산 확대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 지원은 대부분 초기 스타트업에 집중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전반적인 스타트업 투자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책이 민간 출자 회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최근 몇 년 간 투자 환경 악화 상황은 유니콘 기업 숫자로도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으로 등극한 기업은 앞서 언급된 리벨리온(사피온코리아와 합병법인), 에이블리코퍼레이션, 스픽이지랩스 등 3사가 유일하다. 지난 2022년 여기어때, 오아시스, 메가존클라우드 등 7개사가 신생 유니콘으로 등장한 것에 비하면 반토막이 난 셈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넓게 봤을 때 투자 업계의 재원 조달 및 신규 투자가 2023년~2024년 바닥을 치고 지난해 하반기부터 조금씩 반등하는 중이라는 점이다. 향후 금리 인하가 진행되어 고금리 상황이 완화될 시 그간 VC 업계에 보류됐던 드라이 파우더(Drypowder, 투자 집행이 이뤄지지 않은 미사용 자금)가 풀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세컨더리 펀드 출자 역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VC 투자 확대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신생 유니콘의 등장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AI 반도체 스타트업 퓨리오사AI, 앞서 언급된 NPU 기반 온비다이스용 AI 반도체 기업 딥엑스, LLM 개발 스타트업 업스테이지 등이다.
한편 올해는 지난해에 이어 생성형 AI 기술 기반 스타트업이 지속적인 주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단 전제 조건은 기술력도 중요 하지만 기술을 서비스에 접목해 ‘돈’을 만들어 내는 성과가 뒷받침 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성형 AI 기술 기반 AI 에이전트 서비스가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또 그간 모바일, 노트북 기반 디지털 서비스로만 국한 됐던 AI 기술이 물리적인 현실세계에 적용되는 자율주행을 비롯해 휴머노이드(로봇)을 통한 공간지능으로 구현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