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믹과 함께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잠시, 국제 정세는 연이어 터진 전쟁과 공급망 재편, 고금리·고유가·고환율의 삼중고 속에 불확실성이 커져만 가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불확실성은 내년에도 지속될 것이 확실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발달 속도를 놀랍기만 하다. 지난해 말 오픈AI의 ‘챗GPT’ 등장과 함께 시작된 생성형 AI 기술은 각 산업 분야에 혁신적인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기존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변화는 앞으로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한국SW산업협회가 최근 주최한 ‘런앤그로우 포럼’에서는 매년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트렌드 키워드를 제시해 온 ‘트렌드코리아’ 시리즈의 공저자, 전미영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이 다가올 새해 대한민국 소비 풍경을 변화시킬 새로운 트렌드를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트렌드코리아 2009’를 2008년에 처음 쓰기 시작해 벌써 16번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코로나 시대의 보통 명사가 된 ‘언택트’를 비롯해 ‘소확행’ ‘가심비’ ‘뉴트로’ 등 저희가 세계 최초로 제시한 키워드가 적지 않습니다. 다가올 2024년은 ‘청룡의 해’라고 하는데요. 사실 2012년 당시도 용의해 였고 그때 키워드를 조합한 타이틀은 ‘드래곤볼’이었습니다. 올해의 타이틀은 첫 번째 키워드는 D로 시작해 마지막 S로 끝납니다. 바로 ‘DRANGON EYES’죠.”
전 위원이 제시한 2024년 10대 트렌드 키워드는 ▲분초 사회 ▲호모 프롬프트 ▲육각형인간 ▲버라이어티 가격 전략 ▲도파밍 ▲요즘남편 없던아빠 ▲스핀오프 프로젝트 ▲디토소비 ▲리퀴드폴리탄 ▲돌봄경제 등이다.
분초사회, 시간을 겹쳐 쓰고 쪼개 쓰려는 습관의 일반화
요즘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자면, 어느 하나에 몰두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오히려 한 번에 여러가지를 동시에 경험하려는, 이를테면 시간을 겹쳐 쓰는 습관들이 일반화된 모습이다. 1분 1초라도 시간을 그냥 보내지 않고 쪼개 쓰려는 습관도 엿보인다. 가령 TV를 보며 스마트폰을 검색하고 있고, 긴 드라마를 다 보는 대신 유튜브의 요약 영상을 보는 식이다. 직장인의 경우 아침에 출근을 하는 1시간 내외 사이에 뉴스를 체크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기도 하며, 이메일을 확인과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 받기도 한다.
이렇듯 동시에 여러가지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화되며 ‘가성비’보다 돈을 더 내더라도 시간을 더 확보하려는 ‘시성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시간 단위를 더욱 쪼개 쓰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전미영 위원은 이를 “소유의 경제에서 경험의 경제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며 ‘분초사회(Don’t Waste a Single Second : Time-Efficient Society)’라는 키워드로 설명했다.
“넷플릭스를 1.5배속으로 보려 하고, 반차는 물론 반반차까지 등장하고 있죠. 잠자리에 누워 온라인 쇼핑을 하기도 하고요. 사람들은 이제 시간을 잘못 쓰는 것을 극도로 협오하게 됐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해요. 이런 변화는 기술의 발달 때문이기도 하죠. 기술이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잘 쓰게 해주는 거예요. 산업 각 분야에서는 플랫폼 기업들의 시간 쟁탈전, 고객 체감 대기 시간 줄이는 전략 등으로 이런 변화에 대응하고 있죠. 즉 앞으로 기업들은 고객의 틈새 시간을 찾는 방향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간을 빨리 돌리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에게 ‘정시’를 약속해 주는 것이죠.”
AI를 활용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은?
이어 전 위원은 ‘생성형 AI’ 등장과 함께 시작된 트렌드 변화를 지목했다.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가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면 인간은 향후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호모 프롬프트(Rise of ‘Homo Promotus’)’로 제시된 키워드를 통해 전 위원은 “AI를 잘 쓰기 위해서는 AI한테 일을 잘 시킬 수 있는 안목과 창의력이 필요하다”며 말을 이어갔다.
“AI는 인간이 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하지만 다음에 더 잘 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죠. 오직 사람만이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죠. 그런 생각으로 AI를 사용할 때와 아무 생각 없이 AI를 사용할 때의 결과물은 다릅니다. 그런 의미로 ‘호모 프롬프트’는 인공지능의 기술적 결과물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만의 고유한 아날로그 역량을 발휘해 ‘스스로를 넘어서려’ 노력하는, ‘명령하는 사람’을 뜻하는 키워드로 정의했습니다.”
이어 전 위원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집안, 외모, 직업, 돈, 학력, 성격 등의 완벽성을 추종하는 상황을 ‘육각형인간’이라는 키워드로 제시했다. 모든 기준이 꽉 차게 충족할 때 그려지는 육각형은 완벽을 의미한다. 전 위원은 이러한 육각형 신드롬의 배경에 소셜미디어의 확산이 있다고 진단했다. 또 ‘집안’이나 ‘외모’ 등 개인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전 위원은 “브랜드의 경우는 육각형을 지향해야 한다”며 이윤을 넘어서는 철학과 가치가, 그에 맞는 브랜드 이미지 구축이 이제 각 기업들에게 과제가 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기업들이 구사하는 전략이 바뀌고 있다… ‘가격’ ‘사명 변경’ ‘재미 활용’
전 위원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소비자에 발맞춘 기업들의 대응에도 주목했다. ‘버라이어티 가격 전략’ ‘도파밍’ ‘스핀오프 프로젝트’ 등의 키워드를 통해 바뀌는 소비 트렌드에 대응하는 기업들의 전략을 설명한 것이다.
‘버라이어티 가격 전략’의 경우 고객의 정보를 활용해 개인화된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기업들이 시간, 채널, 고객군, 옵션 등의 버라이어티(다양성)을 가격과 연동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똑같은 제품이라도 상황마다 사람마다 느끼는 가치는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상품을 구매하는 시간에 따라, 채널에 따라, 소비자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또 상품 판매 시 옵션에 따라 다라지는 가치를 고려하는 넓은 의미의 버라이어티 가격 전략, 즉 ‘다이내믹 프라이싱(dynamic pricing)’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도파밍’ 키워드의 경우는 도파민(dopamine)과 파밍(farming)를 결합한 말이다. 파밍은 게임에서 비롯된 말로 플레이어가 게임 캐릭터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농작물을 수확하듯 아이템을 모으는 행위를 뜻한다. 도파민은 인간이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경험할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즉 도파밍은 도파민이 분출될 정도로 즐거움을 주는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하고 모아보려는 현상을 의미한다. 전 위원은 “이러한 현상이 주로 10대 청소년 층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영타겟 산업에서 ‘재미’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이어 전 위원은 다양한 영역에서 스핀오프 개념이 확장되고 있는 현상을 짚었다. 사전적인 의미로 누에고치에서 실을 잣듯 ‘파생되다’ ‘분리하다’는 뜻을 지닌 스핀오프는 콘텐츠 분야에서는 원작에서 파생돼 나온 별도의 스토리를 가진 작품’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전 위원은 “기업의 경영 환경이 바뀌고 그에 적응하고자 스핀오프를 적용하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말을 이어갔다.
“스핀오프를 가장 잘 한 기업으로 ‘프라다’가 꼽히고 있습니다. 프라다는 사실 돈 많은 어른을 타깃으로 한 럭셔리 브랜드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20대 젊은 여성들이 프라다를 좋아하기 시작했죠. 프라다 입장에서는 이 고객층의 취향을 반영하자니 기존 고객층의 취향과 갈등이 생기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스핀오프로 해결합니다. 바로 ‘미우미우(MIU IMU)’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대박을 칩니다.”
이러한 스핀오프 현상은 이제 많은 기업들이 채택하는 전략이 되고 있다. 사업 분야가 확장되고 변화되는 것을 감안한 조치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기아 자동차’가 사명에서 ‘자동차’를 뺀 것, SBS가 ‘스브스뉴스’를 별도로 운영하는 것, 마켓컬리가 사명에서 ‘마켓’을 뺀 것 등이다. 스타벅스 커피도 던킨도너츠도 사명을 ‘스타벅스’ ‘던킨’으로 바꾼 것을 꼽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이날 전 위원은 ‘요즘남편 없던아빠’ ‘디토소비’ ‘리퀴드폴리탄’ ‘돌봄경제’ 등의 키워드를 제시하며 변화하는 사회·소비 트렌드에 맞춘 기업 전략 방향성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