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들은 암세포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실시한다. 항암제는 혈관으로 투여되거나 약으로 먹는 방식으로 환자의 전신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과정에서 항암제, 특히 세포독성 항암제를 사용할 경우 암세포만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혈구 세포, 점막 세포, 생식세포 등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들 일부도 손상해 가뜩이나 약한 환자의 기능과 면역력은 더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암세포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세계 경제포럼(WEF)의 클라우스 슈바프 회장은 자신의 책 <제4차 산업혁명>에서 언급하길, 4차 산업혁명의 시발점인 독일 인더스트리 4.0은 생명과학기술 및 나노 기술의 기하급수적인 발전이 더해져 사회의 질적 변화가 도래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즉, 나노 기술이 의학과 만나 상상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을 예측한 것이다.
나노 기술(NT, nano technology)은 원자나 분자 수준에서 물질을 가공하거나 조립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말한다. ‘나노’의 어원은 난쟁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작다’라는 뜻이 강하다. 1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로, 사람의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과 같고 원자 3~4개의 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저 작게 만든다거나 미세하게 만든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물질을 나노 크기로 점점 작게 깎아나가다 보면, 원래 물질이 갖고 있던 속성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예를 들어 노란색 금은 계속해서 작게 자르다 보면 빨간색으로 보인다. 또, 물질이 가진 본질 자체가 변하는데, 물질의 강도가 증가하는 특성을 보인다. 같은 탄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 흑연과 다이아몬드는 서로 연결된 모양이 달라 그 강도와 특성이 상이했으나, 만약 흑연을 나노 단위로 나눠 탄소나노튜브로 재구성할 경우 강철의 100배에 달하는 세기를 갖고 구리만큼이나 전기를 잘 통하게 되며 탄성도 높아진다. 마지막으로 물체를 아주 작게 만들다 보면, 표면적이 커지면서 화학반응이 활발히 일어나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은 나노 항균제나 주름살을 없애준다는 나노 화장품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처럼 나노 기술은 극미세의 세계에서 극대화된 힘을 가져올 차세대 기술로서 주목받고 있다. DNA 구조를 이용하여 동식물의 복제 또한 가능케 하는 이 나노 기술은, 다양한 방면의 산업들과 횡적으로 연결되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초고도의 정밀과학을 요구하는 의학계의 러브콜을 크게 받고 있다. 나노 기술과 만난 의학, ‘나노 의학’은 단순히 나노 물질을 의학적으로 응용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나노 전자 생체센서, 분자 나노기술을 응용한 것까지 그 범위가 넓고 발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나노 의학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기술은 생물분자나 구조가 나노물질과 접목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기능들을 가지게 하는 것들이다. 나노 물질의 크기는 대부분의 생물학적인 분자와 그 크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노 입자를 활용한 약물 전달 기술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앞서 얘기했던 항암제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로, 단백질보다 작은 크기의 나노 입자에 항암제 등의 약물을 담아 암세포 등에 직접 투여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다른 약물 복합체보다 약물 전달이 어려운 부위에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질병 부위가 아닌 건강한 부위에는 약물의 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영국과 인도의 공동 연구진이 찻잎 추출 물질로 개발한 나노 입자로 폐암 세포의 약 80%를 파괴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내놓기도 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진은 혈액 속을 유영하며 유해한 독소와 박테리아를 제거하는 나노 로봇을 개발했을 정도로 불치병과 난치병 정복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에서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소(KBSI)가 미국 MIT와 공동 연구를 통해 24시간 내 2가지 이상의 암을 진단할 수 있는 ‘나노 캡슐’을 개발했다. 이는 체내에 나노 캡슐을 투여해 암세포에 닿으면 형광효과가 나타나, 조직 손상에 거의 영향 없이도 진단 효율성을 향상할 수 있다. 또한 IBS 나노 입자연구단과 KBSI, 국민대 신소재 공학부 연구팀의 공동 연구를 통해 암세포 중심까지 약물을 전달하는 나노입자 치료법을 개발해 주목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연구 실적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실용화와 산업화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은 실정이다. 대한 나노학회장을 지낸 강건욱 서울대 핵의학과 교수는 “나노 의학은 다른 나노기술과 달리 적용대상이 사람의 몸이다 보니 임상 단계에 들어가기 전, 기술에 대한 유효성 검증이 상당히 중요하지만 나노 물질의 특성상 생체 내 흡수율, 흡수경로, 약물 지속성 등의 유효성이 기존 약물의 특성과 다르기에 기존의 임상/전임상 평가 방식이 그대로 적용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나노 항암제 개발을 목적으로 미국 국립암연구소와 미국 식품의약품국, 미국표준 기술 연구소가 공동으로 설립한 미국 나노 연구소(NCL)와 같은 전문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나노 의학의 경우에 걸맞은 경로추적 및 잔류시간 평가를 위한 생체분포, 약물 역동, 치료 효과측정 등 나노 의료기술의 유효성 평가를 위한 고도로 첨단화된 평가기술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평이다. 나노 의학의 발전을 위하여 정부의 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때이다.
김인수 님은 젊은 연구자들의 지식커뮤니티 ‘오베이션’을 운영하고 있는 스타트업 ‘위인터랙트’의 대표입니다.
보다 자유로운 과학기술 지식정보의 공유와 활용을 위한 오픈사이언스 서비스를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https://ovation.so/kiminsu
소셜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