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만난 로컬 비즈니스의 가까운 미래

올여름 십여 년 만에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궂은 날씨에 떠버린 시간. 우연히 근처에 가볼 만한 데가 없나 해서 찾은 곳이 사계생활이었습니다. 사계생활은 동네의 농협은행 공간을 통째로 카페로 재탄생시킨 곳인데요. 듣기만 해도, 독특해 보이는 콘셉트의 공간이 입소문을 타면서, 단숨에 제주도 관광 핫플레이스로 떠올랐습니다.

방문하기 전만해도 단순히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스타그래머블한 카페인 줄 알았던, 이곳. 하지만 직접 경험해본 후, 정말 사계생활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음료가 엄청나게 맛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진이 기가 막히게 잘 나와서도 아니였습니다. 여기서 커머스의 새로운 성공 방정식인 로컬 비즈니스가 정말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컬 비즈니스란 지역을 기반으로 상품을 사고 파는 커머스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요즘 트렌드를, 어찌 보면 역행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사실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되면서, 오히려 오프라인 공간이 주는 독특한 경험의 가치는 올라갔습니다. 프랜차이즈보다는 지역 맛집이 뜨는 이유도 이 때문이죠. 그리고 앞서 말한 기술의 발달을 통한 지역 경계의 소멸은 로컬 기반 비즈니스에도 확장성을 더 했습니다. 과거에는 아무리 매력적인 상품이라도 지역 기반으로는 규모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온라인 채널을 통해 무한히 확장 가능하지요.

그렇다면 사계생활은 대체 어떤 매력과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성공적인 로컬 비즈니스를 구현하고 있을까요? 저를 한눈에 반하게 한 사계생활의 스토리를 지금부터 하나하나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컨셉에 진심인 사계생활

로컬 비즈니스는 지역 기반이면서, 또한 공간 기반이기도 합니다. 지역의 스토리를 담은 체험을 선사하는 공간에서 우리는 로컬의 매력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계생활은 농협이라는 컨셉을 디테일까지 집착하며, 방문자에게 차별적인 경험을 선사해줍니다.

사계생활은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계 마을에 있어서, 이름도 사계생활이지요. 사계리는 제주도 내에서도 다소 한적한 동네입니다. 사계생활을 비롯해서 독립서점이나, 빵집 등이 자리 잡긴 했지만 동네 자체가 가진 분위기는 여전히 고즈넉했습니다. 이렇게 한가로운 시골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엔 무엇이 있을까요? 보통 마을 회관이나 농협 등이 있겠지요? 사계생활은 20년 넘게 사계 농협으로 쓰이던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데요. 일단 이처럼 입지 자체가 지역과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사계생활은 입구부터 정말 남다릅니다 (출처: 아는동네)

그리고 사계생활은 정말 농협 건물 자체를 고스란히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ATM 기기를 그대로 살린 입구부터 시작해서요. 금고나 지점장실을 그대로 살린 공간까지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디테일들이었습니다. 카페 메뉴를 주문하면, 진동벨 대신 은행 번호표를 준다거나, 기존 은행 테이블을 그대로 살린 곳에 다양한 콘텐츠를 비치하는 등 말입니다.

결국 컨셉은 디테일에서 결정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출처: 아는동네)

만약 유행하는 인테리어를 가져다 그대로 써서 공간을 꾸몄으면 어땠을까요? 사진은 조금 더 이쁘게 나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뭔가 사계 마을과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요? 제주도에는 수많은 명소들, 핫플들이 존재하지만, 사계생활이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지역 친화적인 공간에 있었습니다.

이곳을 거닐면서 최근 오픈한 신세계 백화점의 새로운 점포, 아트앤사이언스가 떠올랐는데요. 과학과 엑스포의 도시답게 이름에도 사이언스를 넣은 것은 물론, 백화점의 집객 시설로 카이스트와 협업한 과학 체험관 넥스페리움을 선보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꿈돌이 관련 굿즈를 판매하는, 테마관까지 넣었다고 하는데요. 이렇듯 지역의 헤리티지를 잘 살린 콘텐츠로 오픈 초기부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오프라인 공간을 방문하면, 온라인 구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더 차별화된 경험을 원하게 됩니다. 오직 거기서만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그런 면에서 사계생활의 하드웨어는, 사계 마을의 고즈넉함이 더해진 유니크한 경험을 준다는 측면에서 합격점을 줄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로컬 매거진에서 구독 커머스까지!

하지만 단순히 하드웨어만 뛰어난 곳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사계생활을 만든 재주상회가 추구하는 비즈니스는 로컬리지라는 단어로 표현 가능하다고 합니다. 로컬리지란 단어의 의미는 로컬(Local)을 담는 창고(Storage)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라고 하는데요. 재주상회는 로컬 기반의 라이프스타일 공간에서 로컬 거주민과 로컬 여행자, 로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함께 모여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계생활이라는 하드웨어는 이러한 커뮤니티의 물리적인 중심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드웨어가 있다면, 당연히 소프트웨어도 있겠지요? 재주상회가 만드는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또 다른 축에는 로컬 매거진 '인(iiin)'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innn)'은 제주의 소식을 담은 계간지인데요. 이름의 뜻은 “I’m in island now”인 동시에 제주 방언으로 "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가 이 안에 있다"라는 뜻이 담긴 매거진답게 모든 내용이 제주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광고도 없이 구독과 카페 수입 만으로 수익을 내면서 무려 8년 이상을 버티고 있고요. 지금은 한 번에 만여 부를 찍어낼 정도로 제주 대표 잡지로 손꼽힐 정도라 합니다.

이러한 콘텐츠가 더해지면서, 사계생활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선, 로컬 비즈니스의 진정한 허브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곳을 방문한 고객들은 단지 차와 디저트를 먹는 것이 아니라, 매거진을 통해 제주를 접하고, 여행 후에도 구독을 통해 지역과 연결되게 됩니다. 앞서 말한 오직 오프라인 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제주에 푹 빠진 방문자들은 향후 매거진과 커뮤니티를 통해 계속 로컬과 엮이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 이러한 구독은 커머스로도 확장이 되는데요. 우선 지역 작가들과 협업하여 콘텐츠는 물론이고 다양한 굿즈도 같이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이니스프리 같은 제주를 모티브로 한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기도 하고요. 심지어 사계생활의 2층은 코워킹 스페이스로 할애하여, 이들 창작들과의 협업 접점으로 활용하기까지 하지요.

더욱이 매거진 구독과 연계하여 제주의 제철 음식들을 보내 주는 '계절제주' 서비스도 선보이고 있었는데요. 여행지에서 카페라는 공간을 통해 제주를 만나고요. 여기서 다양한 콘텐츠들을 접하면서 구매를 하게 되기도 하며, 매거진 구독 등을 통해 제주와의 연결고리를 여행 후까지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를 구독 커머스로까지 확장해 나가면서, 정말 로컬 비즈니스가 어디까지 나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래서, 사계생활이 로컬 비즈니스의 완성형 모델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는 겁니다.

숨겨진 공로자 어반플레이


그리고 이처럼 성공적인 모델을 구축할 수 있었던 데는 재주상회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어반플레이의 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반플레이는 도시를 기획하고 도시형 맞춤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는 스타트업인데요. 어반플레이는 대기업, 공공기관, 로컬 브랜드를 아우르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를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사실 어반플레이의 시작은 연남동이었습니다. '연남방앗간'과 '연남장'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요. 단순히 공간뿐 아니라 '아는동네'라는 온라인 미디어를 만들면서 콘텐츠까지 결합시켰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을 벗어나 다양한 매력을 지닌 지역들에서 새로운 모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요. 재주상회와 사계생활은 어반플레이가 협력하여 만든 대표적인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남방앗간도 공간 자체 만으로도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처: 스트리트h)

어반플레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사계생활이 가진 비즈니스의 충실함이 이해가 갔는데요. 어반플레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연남방앗간을 경험해봤었기 때문입니다. 연남방앗간은 1970년대 후반 지어진 양옥 주택에 자리 잡고 있는데요. 이름처럼 참기름을 팔고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양옥과 참기름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다소 억지스럽긴 하지만, 지금이야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만 알고 보면 참기름은 70년대 후반, 부유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핫한 아이템이었다는 거죠. 스토리가 재미있지 않나요?

방앗간을 표방했다는 점도 독특한 면이었는데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방앗간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도 아쉬웠고, 참기름 자체도 공산품만 남기엔 아쉬운 제품이었습니다. 방앗간이라는 공간의 특성에 더해 참기름 소믈리에로도 활동했던 이희준 디렉터의 수제 참기름이 더해지면서 독특함을 더했습니다.

이와 같이 어반플레이는 이미 오프라인 공간을 하나의 미디어로 재설계하고, 여기를 통해 무형의 콘텐츠, 매거진을 유통시키고, 커머스까지 연결시키는 작업들을 성공적으로 해낸 적 있습니다. 더욱이 로컬 비즈니스의 대상이 그 매력적인 제주도인데 성공시키지 못했을 리가 없지요.

스토리를 담은, 컨셉에 충실한 공간과,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이야기를 담은 매거진, 그리고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니크한 상품을 파는 커머스까지 로컬 비즈니스의 성공 원리는 명확합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로컬 비즈니스는 가까운 미래로 다가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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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온라인 영역의 중요성이 커져가면서 반대로 온라인 줄 수 없는 경험을 주는 오프라인의 가치가 역으로 높아지고 있는데요. 이러한 이유에서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로컬 비즈니스도 같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약간 결은 다르지만 당근마켓이 추구하는 하이퍼 로컬 서비스도 지역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미 상당수 많은 스타트업들이 로컬 비즈니스를 표방하며, 업력을 쌓아가고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린 어반플레이나, 로컬 스티치가 대표적인 플레이어들입니다. 어느덧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로컬 비즈니스의 가까운 미래. 소비자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니 정말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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