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이 전기차 배터리를 자체 생산한다는 발표가 지난달에 나와 배터리 및 자동차 업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전기차의 대장격인 테슬라에 이어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인 폭스바겐의 배터리 독립선언은 자동차 산업의 변혁을 예고합니다.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입니다.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의 핵심이 엔진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초기에 자체 엔진 개발 능력이 없어서, 외국산 엔진을 수입해 사용했습니다. 단순 조립회사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었죠. 자체 엔진을 개발하고 나서야 비로소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현대차가 자체 개발한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는 현대차의 위상을 한껏 높여줬습니다. 내연기관 자동차 시대에 안녕을 고하고, 새로운 경쟁의 장인 전기차 시대를 선도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E-GMP 뿐 아니라 배터리 자체생산, 즉 배터리 내재화가 필요합니다. 과거 자체 엔진을 개발했던 때 처럼 말이죠. 전기차 원가 중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30~40% 수준으로 매우 높습니다. 자체 개발을 통해 배터리 원가를 낮춰야 중장기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배터리 자체 개발에 뒤처진다면 과거처럼 껍데기만 만드는 조립회사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죠.
지금은 테슬라와 폭스바겐 2군데 회사가 배터리 내재화에 앞서 달리고 있지만, 일본의 도요타가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나섰고 미국의 GM과 포드 등 기존의 강자들이 배터리 내재화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이미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 역시 전기차 배터리 핵심부품의 수직계열화를 검토하는 등 배터리 내재화 전략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도요타와 마찬가지로 배터리의 전해질을 액체(현재의 리튬이온) 대신 고체로 사용하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나섰습니다. 이를 위해 현대차 남양연구소 배터리 개발실의 조직과 인력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16일 현대차 배터리와 관련해 의미 있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현대차-기아가 배터리 업체인 SK이노베이션과 하이브리드차량 배터리를 공동 개발할 것이라는 발표입니다. 하이브리드차량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반쪽 전기차'로 볼 수 있지만, 양사는 파우치형 배터리의 설계 단계부터 제품 평가와 성능 개선에 공동으로 참여해 2024년 출시되는 차량에 이를 탑재하기로 했습니다.
현대차가 배터리 내재화의 첫 단계로 글로벌 배터리 업체와 협업해 제품의 안정성을 확보하면서 자체 기술력을 점검한다는 점에 의미가 큽니다. 이번 협업에서 현대차는 배터리를 직접 설계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배터리 성능과 안전성을 결정짓는 소재를 검증하고 적용 비율을 포함한 배터리 사양 등을 직접 선택한다고 합니다.
SK이노베이션으로부터 배터리 안전성과 제조 기술력을 흡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배터리 내재화는 대략 5~6년 가량 걸릴 것으로 전망됩니다. 배터리가 고도의 기술력이 응집된 첨단산업인 만큼, 단기간에 완성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현대차가 하이브리드용 배터리를 2024년에 상용화 한다면, 이와 병행해서 순수 전기차 배터리 기술력도 쌓아갈 수 있습니다. 테슬라, 폭스바겐, 도요타 등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오히려 앞서 갈 수도 있습니다.
최초로 배터리 내재화를 선언한 테슬라의 경우 지난해 9월 일론 머스크 CEO가 자사의 행사인 배터리데이에서 3~4년 내 자체 배터리를 생산하는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테슬라는 같은 해 독일의 배터리 회사인 ATW오토모티브를 인수해 이 계획을 실행 중입니다.
그리고 지난 1월 개발 중인 ‘4680 배터리셀’ 생산라인 공개하기도 했죠. 이 배터리는 지름 46mm에 길이 80mm로 테슬라의 기존 배터리보다 주행거리가 약 16% 향상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테슬라는 독일 베를린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배터리 공장 완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도요타는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개발 중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고체 배터리는 전해질이 고체로 바뀌기 때문에 폭발이나 화재 위험성이 대폭 낮아집니다. 이 때문에 꿈의 배터리라고들 합니다.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의 전해질이 액체이기 때문에 열과 충격에 약했고, 이는 최근 잇따라 발생했던 전기차 화재의 주범이기도 했죠.
현재는 도요타가 테슬라나 폭스바겐, 현대차에 비해 전기차 시장에서 주목 받고 있지 못하지만, 전고체 배터리를 들고 나온다면 전기차 시장 구도는 극적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도요타는 이미 자체 개발중인 자사의 전고체 배터리가 '10분 충전에 500km를 달릴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전고체 배터리의 장점 중 하나인 충전속도 절감 특징 때문이죠. 전고체 배터리는 부피가 작기 때문에 에너지용량 또한 늘어나게 됩니다.
도요타가 무서운 이유는 또 있습니다. 전고체 배터리 특허를 무려 1000개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해당 특허의 40% 수준입니다. 다른 업체가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기 위해서 도요타의 특허를 피해 갈 수 없어 보입니다.
폭스바겐은 자체 배터리 생산 계획을 밝히며 2030년까지 유럽에 6개의 40GWh 규모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자체 배터리 개발과 함께 배터리 주요 협력사로 중국의 CATL을 선택했습니다. 당초 LG에너지솔루션(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주요 공급처였지만, LG와 SK가 2년이 넘는 '배터리 소송전'을 치르면서 신뢰성과 지속 공급가능성에 실망을 한 것이죠.
지금은 LG와 SK가 합의를 했지만, SK가 패소했을 때만해도 폭스바겐과 포드는 자사의 전기차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었죠. 공급망이 불안해 지면서 완성차 업체들은 자체 배터리 생산의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꼈고, 이것이 배터리 내재화를 앞당긴 계기가 됐습니다.
완성차 업체가 기존 배터리 업체의 기술력과 안정성을 쫓아가기에는 기술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시간이 걸립니다. 만약 자체 개발에 성공을 하더라도, 수율 확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기존 배터리 업체와의 공존은 필수입니다.
GM의 경우를 보면, LG화학과 협업으로 배터리 내재화에 뛰어들었습니다. 현대차-SK이노베이션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3월에 자체 개발한 배터리-전기차 플랫폼을 공개했는데, 이 배터리를 GM와 LG화학이 공동 개발했습니다.
이번 현대차-SK이노베이션의 협업은 완성차 업계와 배터리 업계의 공존과 현대차그룹의 배터리 기술력 확보에 의미있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둘 다 한국 기업이기 때문에 향후 해당 산업에서 국내 기업이 더 큰 시너지를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