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방영된 시리즈 중 클로이 모레츠의 <더 페리퍼럴>(The Peripheral)이라는 SF 장르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인 2032년 미국의 어느 평범한 마을, 가족의 삶을 지키기 위해 3D 프린터 인쇄소에서 일하는 플린 피셔(클로이 모레츠)가 거대한 가상 세계로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린다. 손목에는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차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에 올라타 자신이 일하는 인쇄소로 달려간다. 그녀가 현실에서 근무하는 곳은 3D 프린터로 고객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주는 작은 가게다. 어느 날 첨단 VR 기기를 통해 '심'이라는 게임에 접속하게 된다. '반수면상태'라도 된 듯 가상 세계에 푹 빠지게 되는 플린은 게임 상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하며 크게 활약한다. 이후 플린은 게임을 즐기면서도 주어지는 특정 미션을 완수하게 되면 놀라울 정도의 보수를 지급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다시금 가상 세계에 빠진다. 하지만 현실과 미래의 세계가 일종의 수평상태를 이루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처음과 끝이 일정한 수준의 러닝타임으로 존재하는 영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드라마의 플롯 자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32년 현실에서 3D 프린터 기술을 통해 원하는걸 손에 얻기도 했고 가상 세계로 이끄는 첨단 VR이 등장했으며 생체인증이 필요한 ATM도 스쳐 지나갔다. 가상의 공간에서는 투명해 보이는 자동차가 나타나기도 했고 안드로이드 로봇이 공존하는 세계를 그려냈다. 생각해보면 SF 드라마라는 장르답게 생각하지 못한 테크놀로지가 자연스럽게 깔려있었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었던 플린은 가상의 게임 공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만 현실에선 3D 프린터를 만지작 거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좋든 싫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현실이야"
<The Peripheral> 출처 :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이 작품을 토대로 가상현실이나 메타버스를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눈길이 가던 것은 2032년 현실 속에 존재하던 3D 프린팅 기술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기계를 만지작 거리며 신기해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던 플린 피셔에겐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속에서 3D 프린팅 기술 역시 종종 언급이 되곤 했었다. 그 기술 역시 점진적으로 발전을 이루어 '고도화' 되기도 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프린터의 경우는 보통 다양한 형태의 종이를 넣고 출력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많이 쓰는 A4 용지부터 B3 등 크기만 달랐을 뿐 2차원 평면에 불과했다. 사실 특수한 인쇄를 위해 인쇄소를 찾아가는 경우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3D 프린터는 3차원이라는 입체적 개념을 텅 빈 공간에 인쇄하는 장치라 하겠다. 당연하지만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문서를 넘어 3차원 도면 데이터가 출력에 필요한 기본적 요소다.
<더 페리퍼럴> 중 플린이 일하는 인쇄소. 출처 : <더 페리퍼럴> from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극 중에서도 고객이 원하는 대로 커스텀 컬러(Custom Colors)나 타입에 관계없이(All file types) 모두 출력 가능하다고 써붙이기도 했다. 레진이나 필라멘트라는 키워드를 볼 수 있는데 3D 프린팅에 필요한 재료 같은 것이다. 열로 녹인 필라멘트를 압출하여 레이어를 쌓는 FDM(Fused Deposition Modeling) 방식, '액체화'된 광경화성 레진에 레이저를 쏴서 하나씩 원하는 모양의 물체를 쌓는 SLA(Stereo Lithography Apparatus) 방식 등이 있다.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 하나의 가게 같지만 다수의 3D 프린터가 작동하고 있는 곳이다. '3D프린터 운용기능사' 라는 국가 자격도 있는 상황이니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오버 테크놀로지도 아니지만 그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종이 인쇄물만큼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3차원 프린터는 과연 어떠한 원리로 물건을 인쇄하게 될까? 위에서도 언급했듯 방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3차원 데이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라고 하면 가장 심플한 답변이 될 것 같다. 일반적인 프린터처럼 잉크도 아니고 토너도 아닌 플라스틱, 금속 혹은 가루 형태의 파우더를 쓰기도 한다. 재료를 넣고 3D 프린팅에 필요한 도면을 분석한다. 사이즈를 설정하고 정해진 온도에 맞춰 빈 공간에 레이어를 쌓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형태다. 클로이 모레츠의 이 작품은 2032년 배경이니 아마도 레이어를 적층 하는 시간 자체가 빠를 수도 있겠다. 더불어 미세하게 드러나는 입체적 레이어 역시 깔끔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역시 FDM이나 SLA 방식의 차이로 결과물의 정교함이 달라질 수도 있기는 하다.
바릴라(Barilla)의 파스타(좌), 오픈밀스의 초밥(우) 출처 : open-electronics.org
음식도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사실 재료만 있다면 음식도 가능하다. 이탈리안 음식 개발기업인 바릴라(Barilla)에서는 3D 프린팅 테크놀로지에 파스타를 접목시켰다. 파스타면 재료를 아예 3D 프린터로 뽑아내는 것이다. 완성된 파스타면을 가지고 토마토나 오일 혹은 크림 베이스로 잘 버무리는 과정을 거치긴 해야 한다. 다만 설탕도 넣고 초콜릿도 넣고 향료나 기타 다른 재료를 넣어 사탕이나 초콜릿의 완성본을 3D 프린팅 기술로 구현할 수도 있다. 이미 재료만 구비되었다면 말이다. 일본의 오픈밀즈는 픽셀 푸드 프린터로 초밥의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아가 스시 싱귤레러티(Sushi Singularity)라는 초밥 시스템은 개인별 건강 정보 데이터를 바탕으로 식재료 카트리지, 14가지의 영양 성분을 담은 실린더와 3D 프린팅에 필요한 적절한 온도와 발효조 등의 다양한 집합체가 개인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낸다고도 했다.
더불어 3D 프린터 기술은 우주로 뻗어나가는 중이다. 우주정거장에서 우주비행사들이 급히 필요로 하는 소형 부품들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떠한 부품이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급하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용도로 쓰이게 된다. 실제 지구로부터 공급을 받을 수도 있지만 시간도 걸릴 뿐 아니라 비용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러한 이슈를 해결해주는 것 역시 3D 프린터 프로젝트가 해결해 주고 있는 셈이다. 다만 복잡하지 않아야 하고 설계 또한 쉬워야 할 것이며 또한 위험성도 없어야 하겠다. 미국의 랠러티비티 스페이스(Relativity Space)는 3D 프린팅 테크놀로지로 로켓의 연료통과 엔진도 만들어내 실제 연소시험까지 마쳤다고도 했다. 3D 프린터만 있으면 빠른 시일 안에 그것도 비용도 절감하며 로켓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포인트는 수만 개의 부품을 고작 천여 개 수준으로 부품 자체를 최소화하는 것에 있다. 물론 소형 로켓에 국한되어 있지만 테크놀로지가 고도화되면 중형에 이어 대형 로켓도 멀지 않은 듯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 중 <클로버필드 패러독스>에서는 3D 프린터를 통해 작은 소형 권총을 만들기도 했다. 픽션이었지만 그 권총은 동료 우주 비행사들을 충분히 위협하는데 쓰였다. 당연하지만 무엇이든 만들어낸다는 3D 프린터에서 권총이나 폭탄 등 위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법적 규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기적 같은 존재가 누군가를 위해 악용되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보다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도와 3D 프린터만 있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져 거래까지 된다고 하니 미국에서도 이를 규제하는 이른바 '유령총 규제법'이 발표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유령총이 3D 프린터 등을 통해 불법으로 만들어진 총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류와 환경, 비즈니스, 과학 등에 매우 이로울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긍정적인 측면 뒤로 이를 저해하는 극단적 이슈들이 종종 기술 발전을 가로막기도 한다.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술 발전에 의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린 피셔에게는 먹고살기 위한 공간이었을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적이 실현되는 곳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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