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상회에서 만난 사람] 김성희 하나도가 대표 “남한에서 재현한 북한 술의 맛, 남과 북을 넘어 세계로 알릴 겁니다”

고향인 북한 함경북도 가양주 비법 살려 ‘북한 전통주’ 아이템으로 창업, 아산상회 5기로 스케일업 시도
남한 출신 부친으로 인해 ‘남조선 출신 집안’ 꼬리표에도 불구, 능력 인정받아 인민군 복무 후 ‘준의사’의 삶 살기도
작은 병 속에 통일된 한국을 담는다는 마음으로 빚은 전통주, 위스키 못지 않은 세계적인 술로 만들 것

새로운 삶을 찾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의 수는 3만명(2022년 기준 3만300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새터민 혹은 통일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의 남한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줄곧 남한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부족한 정보력, 인적 네트워크 등 극복해야 하는 차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에는 창업이라는 바다에 뛰어들어 새로운 기회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북한 출신 창업가들을 지원하는 아산나눔재단의 포용적 창업지원 프로그램 ‘아산상회’를 통해 ‘성공’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3인을 만났다. ‘아산상회에서 만난 사람’ 시리즈의 두 번째 주인공은 어린 딸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북한을 탈출한 후 고향 집 가양주 제조 비법을 활용해 ‘북한 전통주’ 아이템으로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김성희 하나도가 대표다.

충북 음성에 위치한 하나도가에서 만난 김성희 대표. (사진=테크42)
(왼쪽부터) 김성희 하나도가 대표, 박영금 이사. 두 사람은 탈북민 출신 한부모 가정의 엄마라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전통주 제조로 승화시키고 있다. (사진=하나도가)

서울서 출발해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평택제천고속도로로 내달려 대략 2시간 반 거리, 충북 음성에 위치한 하나도가는 고즈넉한 국도 한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 하나도가가 들어선 것이 2018년 11월이니 어느덧 5년 전의 일이다. 같은 처지의 탈북민 출신 박영금 이사와 함께 하나도가의 문을 연 김성희 대표는 그보다 앞선 10년 전 북한을 탈출해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남한에 왔다. 2008년 가을, 3살짜리 딸을 업고 두만강을 건넌 것이 시작이었다. 그런 김 대표가 남한 중에서도 충북 음성에 터를 잡은 이유는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과 비슷한 물맛 때문이었다고 한다.

15년 가까운 남한 생활 동안 딸은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는, 어엿한 고등학생으로 성장했다. 김 대표의 삶 역시 큰 변화를 거듭했다. 빈손으로 시작해 술도가까지 창업하는 과정이 쉬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푸근한 미소로 맞이하는 김 대표의 얼굴은 고생의 흔적은 고사하고 밝은 기운이 넘쳐 보였다. 과연 무엇이 그녀를 이렇듯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한 것일까?  

아산상회 5기 프로그램을 거치며 더욱 커진 목표

김 대표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제주(祭酒) 비법을 살려 하나도가를 통해 ‘태좌주’ 선보였다. 태좌주는 고추씨를 넣어 발효한 45도의 과하주다. (사진=하나도가)
하나도가의 '농태기주'. 김 대표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 지방에서는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들을 위해 쌀앙금으로 빚은 25도 증류식 소주인 ‘농태기주’를 가양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하나도가)

“벌써 5년이 지났네요. 몇 년이 걸려 주류 제조 면허를 따고 시설 시공부터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하나씩 만들어 갔죠. 주변에서는 자본도 없고, 인적 네트워크도 부족한 탈북민이 왜 제일 험난한 창업을 하냐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술을 빚어 1년 정도 숙성을 하는 과정까지 마치고 2019년 10월부터 판매를 시작했는데, 기가막히게도 코로나19가 퍼지더군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5개씩 하면서 버텼죠. 힘들진 않았어요.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생사를 오가는 탈북 과정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어려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죠.”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이처럼 적합할 수 있을까? 코로나19 팬데믹의 위기를 버텨내니 빛이 보였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제주(祭酒) 비법을 살려 만든 ‘태좌주’와 서민들의 가양주인 ‘농태기주’는 국내에서 드문 북한 전통술로 주목 받으며 입소문을 탔다. MZ 세대가 주류 시장에 주요 고객으로 떠오르며 술 문화의 저변이 넓어진 영향도 있었다. 다양한 취향이 시장에 반영되며 하나도가의 도수 높은 북한 전통주가 관심을 모은 것이다. 물론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김 대표는 “그 과정을 거치며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자신감”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5년간 하나도가를 운영하면서 술 문화나 취향이 크게 변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희 태좌주와 농태기주의 인지도가 높아졌죠. 실제 양조장을 직접 방문해 술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고객들이 많아졌어요. 그런 변화를 경험하면서 자심감을 얻은 것이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변화를 경험하고 나니 언젠가 통일도 정말 예고 없이 이뤄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웃음).”

그러면서 김 대표는 하나도가의 변화 계기를 아산나눔재단의 탈북민 대상 창업 지원 프로그램 ‘아산상회’로 꼽았다. 그저 북한 술의 맛을 재현한다는 일념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정성을 담아 술을 빚겠다는 마음으로 문을 연 하나도가가 기업으로서 비전을 세우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 것이 모두 아산상회 덕분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남북하나재단을 통해 권유를 받고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참여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수작업으로 모든 것을 하는 상황에서 하루가 아쉬운 마당에, 음성에서 서울을 오가며 창업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죠. 그런데 서류가 통과되고 면접 심사에 뽑히더군요. 그렇게 나간 자리에서 처음 느낀 충격은 제가 제일 나이가 많다는 거였어요. 창업에 도전하는 젊은 탈북민 출신 창업가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런 젊은 친구들과 함께 제가 뽑혔다는 사실에 또 놀랐죠. 그렇게 기업으로서 목표를 설정하고 운영하는 방식과 새로운 정보들을 접하면서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지난달 초 아산나눔재단 창업가 플랫폼 '마루180'에서 진행된 '아산상회 5기 데모데이' 현장. 이날 김성희 하나도가 대표는 자신의 스토리를 비롯해 하나도가의 발전 발향에 대해 IR 피칭을 진행했다. (사진=아산나눔재단)

그런 과정을 통해 김 대표가 처음 설정한 하나도가의 비전은 ‘작은 병 속에 하나된 대한민국을 담아가는 양조장’이다. 돌이켜 보면 딸 하나 잘 키우고 싶은 욕심에 목숨을 걸고 온 남한에서 창업까지 감행한 것은 북한에서는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시도였다. 그리고 그 시도로 시작된 하나도가의 비전은 지금 더욱 크게 확장되고 있다.

“아산상회 프로그램을 경험하면서 저희가 어떤 마음으로 술을 빚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정성을 담아 빚은 술을 맛보게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작은 병에 담긴 술로나마 남과 북의 통일을 이루고 싶다는 바람으로 커진 거죠. 그리고 그 바람은 우리나라의 전통주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맛보게 하고 싶다는 비전으로 이어졌어요. 아직까지 우리 술보다 위스키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 저는 좀 자존심이 상해요. 우리 술도 그에 못지 않은 역사와 정성이 담겨있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된, 통일된 대한민국의 술에서는 이런 멋진 맛과 향이 나온다는 것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그런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 되겠다는 것이 하나도가의 새로운 비전이예요.”

문득 지난달 초에 진행된 ‘아산상회 5기 데모데이’에서 주목 받은 김 대표의 IR 피칭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김 대표는 고추씨를 넣어 발효한 45도의 과하주인 ‘태좌주’와 집집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들을 위해 쌀앙금으로 빚은 25도 증류식 소주인 ‘농태기주’를 재현한 과정을 소개하며 온·오프라인으로 확장하고 있는 유통 채널을 강조하기도 했다. 유명 프로그램인 ‘한국인의 밥상’에도 소개돼 진행자인 배우 최불암 씨로부터 ‘진짜 술’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는 일화를 털어 놓던 김 대표의 발표는 여간 능숙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도가의 전통주는 유명 TV 프로그램인 '한국인의 밥상'에도 소개 됐다. 당시 진행자인 배우 최불암 씨는 술 맛을 보고 '진짜 술'이라는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게 가장 어려웠어요(웃음). 탈북민들이 제일 취약한 것이 자기 PR을 못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회사소개라던가 PPT 자료조차 없었죠.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집 뒤 운동장을 돌면서 발표 내용을 외우고 또 외웠죠. 운동장 연단에 올라서서 딸을 심사위원처럼 앞에 두고 인사부터 시작해 제스처까지 진짜처럼 연습을 했어요. 딸 아이도 ‘말투를 바꿔보라’ ‘겸손하게 보여야 한다’고 코치를 해주면서 도왔죠. 함께 준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웃음).”

딸을 위해 선택한 목숨을 건 탈출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고교시절부터 특출 난 운동신경의 소유자였다. 덕분에 체육특기생으로 군에도 입대할 수 있었다. 알려진 바로는 북한에서 군 입대는 당원 자격을 인정 받는 것으로 이른 바 출신성분을 따진다. 김 대표는 부친이 경상남도 김해, 즉 남쪽 출신이라는 이유로 신분적 제약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김 대표는 “남보다 10배, 100배 잘하면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노력하는 노력파였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제대 후의 삶도 북한 기준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함경북도에 위치한 병원에서 김 대표에게 부여된 역할은 ‘준의사’였다. 남한으로 치면 간호사에 해당하는 역할이었다. 다른 점은 간단한 처방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약과 치료도구 모두 환자가 구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도 김 대표는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봤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북한의 상황 하에서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직면한 남편의 죽음은 김 대표를 탈북으로 이끌었다. 하나 뿐일 딸을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김 대표는 딸과 함께 동남아 루트를 거쳐 북한을 탈출 과정에서 악어가 헤엄치는 강을 무동력 고무보트에 의지에 건너야 했다. 당시를 떠올리던 김 대표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보트에 몸을 실었다"고 돌이켰다. (사진=픽사베이)

“딸 역시 그대로 북한에 있으면 어디를 가든 저처럼 ‘남조선 출신 자녀’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야 했어요. 딸에게 만큼은 그런 짐을 떨치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고 싶었죠. 초겨울 한밤중에 살얼음이 낀 두만강을 건넜어요. 강을 두고 양쪽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막 세 살이 된 딸을 목마 태우고 물 속을 헤쳐 나왔어요. 천만 다행으로 딸도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숨을 죽이더군요. 만약 조그만 소리라도 냈으면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졌을 거예요.”

사선을 넘나드는 위기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을 넘을 때는 북한의 자동보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을 마주하기도 했다. 악어가 사는 강을 무동력 고무보트에 의지해 건너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바로 앞에 출발한 일행이 악어에 물려 갔다.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보트에 몸을 실었다. 돌이켜 보면 모두 천행(天幸)인 듯했다.

이후 15년여의 세월이 흐르며 딸은 어느덧 고등학교 2학년으로 성장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너무 어렸던 덕분에 딸은 북한에서 탈출했던 날들을 기억 하지 못한다. 대신 딸의 추억은 남한에서 살아온 나날들로 채워졌다. 그 사이 화가였던 딸의 꿈도 교사로 바뀌었다고. 김 대표는 “진로를 고민하는 딸에게 정한 것을 끝까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해 줬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 대표는 어린 딸을 제대로 키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너무 어렸던 탓에 딸은 그 과정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삶을 보며 커온 딸은 일찍 철이 들었고, 중학교 3학년 무렵 김 대표에게 "엄마 나를 남한으로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미지=픽사베이)

“어린 때 일을 기억 못하는 딸에게 엄마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진 않았어요. 사실 딸은 생에 대부분을 남에서 지냈으니 남한 사람이죠. 한 번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뭣도 모르고 자기 고향이 북한이라고 이야기했나 봐요. 아이들도 어릴 때라 잘 모르니 ‘북한이 어디야, 미국이야?’라고 하곤 넘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후부터 얘가 고향이나 부모에 과거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크면서 호기심이 생긴거죠. 중학교 3학년 무렵인가, 한 번은 용돈을 모아 제 생일 선물을 사주면서 저를 끌어안고 ‘엄마 나를 여기(남한)까지 데려와 줘서 고마워’라고 하더군요. 그 말 한 마디에 여러가지 걱정이 다 사라졌던 것 같아요.”

하나도가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죠

남한으로 온 초기 김 대표는 충북 음성에 위치한 모 자동차부품제조회사에서 현장검사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8년 간 단 하루의 결근도 없이 근무를 한 덕분에 표창까지 받는 등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그러면서 세종사이버대학교에서 경영학과 사회복지학을 복수전공해 졸업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남한 생활에 익숙해진 어느 날부터 그녀는 사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딸을 제대로 뒷바라지 하기 위해서는 월급생활만으로는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업 아이템을 고민하던 김 대표에게 베란다에 놓은 술 항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고향에서 아버지를 위해 술을 담그던 것을 잊지 못해 만들어 놓은 술 항아리였다.

“북한에서는 전통주라는 인식 조차 없었어요. 알려주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저 집안 비법으로 이어온 내림주인데, 문득 ‘이것 만큼은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구나 남한에서는 더더욱 저밖에 만들 수 없는 술이었죠. 하지만 제대로 하자면 남한 술이나 제조법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심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운영하는 2년제 교육과정에 지원한 것이다. 김 대표는 이후 2년간 매주 2일씩 진행하는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과 음성을 오갔다. 수업이 끝나는 밤 10시에 차를 몰고 음성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며 끝내 모든 과정을 수료했다.  

그렇게 하나도가의 문을 연 김 대표는 ‘태좌주’와 ‘농태기주’를 차례로 선보인데 이어 이달 중순 ‘삼팔주(38주)’라는 새로운 제품을 선보일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이디어는 아산상회 프로그램 과정에서 함께한 탈북민 창업가들과 이야기하던 중에 나왔다.

하나도가가 12월 선보일 '삼팔주'. (사진=하나도가)

“어느 날인가는 ‘38선’이 언제 열릴까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가 이어졌어요. 다양한 방식의 통일에 대한 예측들이 나오는데, 문득 저는 술을 빚는 사람이니 38선을 열 정도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모두를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술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의미를 담아 도수도 38도로 맞춰 빚었죠. 그 외에도 삼팔주에는 북한에서 내려온 고구려의 술 제조 기법을 적용했어요. 특징은 술을 술로 감미하는 ‘과하주’라는 거죠. 예컨대 남한의 일반소주는 알코올 향과 쓴 맛이 특징이잖아요. 그것도 감미료를 넣어 맛을 조절하는데, 북한은 감미료 대신 약주를 써요. 추운 지방이다 보니 북한에는 도수가 높은 증류주가 주를 이루는데, 맛이 단조롭거든요. 거기에 약주를 섞어 감미를 하는 ‘과하주’를 만드는 거죠. 그래서 ‘38주’는 도수가 높은 술이라는 느낌이 없이 누룩이나 곡물의 향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맛을 본 분들은 ‘대한민국의 양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하시더군요(웃음).”

그렇게 북한의 전통주를 남한에 소개하는 김 대표에게는 또 다른 꿈이 있다. 충청도를 비롯해 남한 각지의 전통주 빚는 방법을 활용해 언젠가는 북한에 남한의 전통주를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다. 김 대표가 ‘삼팔주’에 담은 바람과 같이 언젠가 38선이 열리는 날이면 가능해질 소망이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하나도가의 성장은 필수다. 인터뷰 말미,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김 대표의 목소리에서 새로운 각오가 느껴졌다.

(왼쪽부터) 하나도가 박영금 이사와 김성희 대표. (사진=하나도가)

“아산상회 프로그램을 거치며 여기 저기서 새로운 기회와 투자 제안을 받고 있어요. 또 올해 30개였던 오프라인 매장을 50개로 확대하고 있죠 네이버쇼핑,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비롯해 다양한 온라인 유통망을 확보해 나가고 있고요. 앞으로는 온라인에 최적화된 물류 시스템 구축도 해야 하고, 글로벌화를 위한 홍보도 진행해 보려 합니다. 마침 최근 싱가포르와 캐나다 한인회를 통해 제안이 들어왔어요. 지인을 통해 맛본 저희 술을 현지에서 판매하고 싶다는 말씀을 주셨죠. 그러려면 생산량을 늘려야 하고 인력도 충원해야 해요. 이왕이면 저와 박영금 이사처럼 탈북민 출신 한부모 가정의 가장들을 대상으로 모집을 하려 해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함께 돕고 아이들을 키우며 성장해 나가는 가족 같은 기업으로 만드는 것도 목표 중 하나죠.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황정호 기자

jhh@tech4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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