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줘라. 그렇지 않으면 사라진다(Demo or Die)’
이 말은 실제로 세계적인 미디어융합 기술연구소인 미국 MIT 미디어 랩의 비공식적인 신조인데요. 즉,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면 우선 이를 시각화해 보여주라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사장돼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자이너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프로토타이핑’ 과정을 통해 이렇게 일해 왔다고 하는데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약 10여 년 전, 구글(Google) 개발자들은 안경을 쓰면 현실 세계와 컴퓨터 속 세계가 합쳐지는 새로운 신제품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요(지금의 AR기기 '구글 글래스').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우선 그 프로토타입(prototype), 즉 시제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단 하루 만에 말이죠. 아무리 프로토타입이라지만 어떻게 상상 속 제품을 하루만에 만들었을까요? 그건 진짜 막 만들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종이와 옷걸이 등 눈 앞에 놓인 재료로 안경의 '모양'만 만들었으니까요.
그럼 구글 개발자들은 왜 이런 유치한 종이 안경 수준의 프로토타입을 만든 걸까요? 이는 머리 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우선 시각화, 구체화해야 설득이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인데요. 이를 활용해 동료나 파트너와 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죠. 사실 혁신적인 제품일수록 추상적인 말이나 글로는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을 사기 어려운데요. 하지만 이를 시각화해 보여주면 사람들은 우선 직관적으로 그 아이디어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 무턱대고 퇴짜를 놓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궁금증이나 의견을 묻게 되고 구체적인 피드백도 제시하게 되는 것이죠.
사실 이런 프로토타입은 그 동안 디자이너들이 주로 사용한 작업방법인데요. 그들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우선 이를 쓱쓱 스케치하거나 주변의 재료로 뚝딱뚝딱 모형을 만들어 우선 시각화합니다. 가령 ‘이번 시즌 옷은 팔 길이를 길~게 하고 몸통은 타이트하게, 색깔은 원색 중심으로 만들려고 합니다’라고 말로만 설명하지 않죠. 일단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아들여 수정해 갑니다.
프로토타이핑, 완벽한 계획과 절차에 익숙할수록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최근 기업들이 창조와 혁신을 위한 다양한 기법들을 찾기 시작하면서, 어떤 직군 보다 창조적이고 감각적이라고 인정받는 디자이너들의 이런 작업법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사실 대부분의 기업에선 계획, 절차, 논리가 중심이 되는 ‘경영학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실행, 감성 등이 중요시 되는 ‘디자이너적 사고’에 기반한 이런 프로토타입 작업은 낯설게 다가오는 게 현실인데요.
미국의 자동차 제조업체 크라이슬러에서 컨버터블 자동차를 개발할 때의 일화를 함께 살펴보시죠. 지붕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보고 받은 전 CEO 리 아이어코카(Lee Iacocca)는 수석 엔지니어에게 우선 그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말로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의 지시를 받은 엔지니어는 ‘9개월 안에 프로토타입을 만들겠습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러자 CEO는 ‘지금 당장 가서 차 천장을 잘라내라고!’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보다 완벽한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데만 익숙한 기업들을 보며 세계적인 경영 구루인 톰 피터스는 이렇게 말했는데요. "경영대학원 ‘덕분에’ 많은 비즈니스 종사자들은 무언가를 실행에 옮기기 전에 말하고 또 말하고, 계획하고 또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현명한 경영자들은 말하고 계획하는 동안 신속히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이를 조정해 간다"라고 말이죠. 실제로 1990년대 초 실시된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캐슬린 아이젠하르트와 배넘 바브리치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계획을 세우는 데 적은 시간을 소모하고 실전에서 많은 시간을 소모한 팀이 그렇지 않은 팀보다 더 혁신적인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애플의 아이폰도 한 기능당 10번 이상의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하죠.
자, 그럼 이렇게 아이디어를 시각화, 구체화하고 이를 다듬어가는 프로토타이핑은 제조업에서만 쓸 수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비스업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원 서비스 개선을 위한 한 프로젝트에서는 일을 맡은 직원들이 바로 사무실을 병원으로 꾸미고 서로 ‘롤플레이’를 했다고 하죠. 또한 ‘실물의 축소판’을 만드는 방법도 활용되고 있는데요. 가령 대형 마트의 매장 동선을 보다 효율적으로 짜기 위한 프로젝트가 있다면 이 매장의 구조와 공간 배치 상황을 축소판으로 꾸미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하나씩 적용해 볼 수 있겠죠.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했습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이를 말이나 글로 설명하려 애쓰기 보다, 먼저 프로토타이핑 작업을 통해 시각화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며, 동료나 파트너와 보다 명확한 의사소통을 하고 구체적인 피드백을 받게 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