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인’…, 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의 이름 앞에는 늘 붙는 수식어다. 그가 1만 8000대 1이라는엄청난 경쟁을 뚫고 ‘한국 최초 우주인 프로젝트’ 후보로 선정된 것은 지난 2006년의 일이다. 이후 러시아까지 이어진 2년여의 여정은 돌발 변수를 만나며 우주인 최종 후보에서 탈락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적어도 세상이 바라본 그의 상황은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멈춰서 버린 기차와 같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지난 아쉬움을 뒤로 한 그는 항공우주연구원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며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우주인 후보 탈락에 대한 심경을 듣기 위한 만남이었던 터라 조금은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당시 그의 모습은 우려했던 것과 달랐다. 의욕이 넘쳤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정이 눈동자를 채우고 있었다.
이후에도 그의 소식은 간간히 접할 수 있었다. 미국 유학을 떠났고, 돌아와 기술창업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타이드인스티튜드를 설립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후 그의 이름과 함께 등장한 키워드는 3D 프린터였다. 당시 4차산업혁명과 더불어 3D 프린터는 ‘어떤 물건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법상자’처럼 여겨지며 이상 현상이라 할 만큼 엄청난 이슈가 됐다. 한동안은 어디를 가도 3D 프린터가 작동되는 시연 현장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열기는 이내 잠잠해 졌다. 이후 그의 소식을 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의 이름과 함께 검색되는 키워드는 ‘카파(CAPA)’로 바뀌어 있었다. 제조업의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는 플랫폼이었다. 그 사이 세월은 10여 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10여 년의 시간을 넘어 마주한 자리에서 그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기차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반가움으로 시작된 인터뷰는 놀라운 가능성을 보이는 플랫폼 CAPA와 그의 지난 이야기로 이내 진지해 졌다.
제조 분야 소비자와 공급자를 연결하는 디지털 혁신 플랫폼
에이팀벤처스가 운영 중인 CAPA 플랫폼은 지난해 9월 MVP(Minimum Viable Product, 최소한의 기능을 담은 시제품)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이는 에이팀벤처스가 지난 사업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긴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13년 설립된 에이팀벤처스의 초기 사업은 알려진 대로 3D 프린팅 제조업이었다. 이후 시행착오를 거치며 3D 프린터를 공유하는 플랫폼 ‘쉐이프엔진’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고산 대표의 눈에는 더 큰 시장이 들어왔다.
“3D 프린터 공유 플랫폼을 운영하다 보니 앞서 3D 프린터 제조를 하며 경험한 제조업 전 분야를 모두 연결할 수 있는 플랫폼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서비스가 ‘크리에이터블(CREATABLE)’이었죠. 산업용 장비를 활용한 3D 프린팅을 비롯해 금형사출 제품, 컴퓨터 수치제어 등 제조 전분야의 가공업체와 이를 필요로 하는 수요자들을 연결하는 서비스였어요.”
크리에이터블의 비즈니스 모델은 CAPA 플랫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달랐던 것은 에이팀벤처스가 중계자로 나서 게이트키핑을 하며 제조 대행까지 진행했다는 점이다. 제품을 필요로 하는 고객과 만들어주는 파트너사 간에 직접적인 접촉 없이 주문과 제작 과정을 에이팀벤처스가 처리했던 것이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규모화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고 대표는 이 과정에서 “고객들의 다양한 요구 사항을 접하며 다른 방식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털어놨다.
“오프라인으로 어렵사리 이뤄지던 제조업의 거래 과정을 온라인으로 끌어들인 것 까지는 좋았어요. 하지만 저희가 중간에서 오퍼레이팅을 하는 비용이 적지 않았고 퀄리티를 맞추는 것도 굉장히 중요했죠. 무엇보다 고객과 파트너사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소통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몇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업을 피벗(pivot)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 조건이 필요했다.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야 했고 고객과 파트너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최적화 도구도 필요했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 시행착오를 거치며 제조업에서 수요자와 공급자가 직면하는 어려움은 이미 파악된 상태였다. 더구나 에이팀벤처스에게는 이미 준비된 무기도 있었다.
“크리에이터블을 진행하며 고객과 파트너 사이에서 상담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상황에서 도면을 보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나 이메일로 소통하는데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당시 내부용으로 고객과 파트너사와 상담을 위한 툴을 개발했어요. 온라인 상에서 웹링크를 보내고 상대가 그걸 클릭하면 도면이 뜨면서 실시간 공유 상태에서 채팅을 통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툴이었죠. 굉장히 반응이 좋았어요. 도면을 베이스로 소통할 수 있는 툴은 이미 있고 고객과 파트너가 직접 만날 수 있는 플랫폼만 갖추면 된다는 확신이 들었죠.”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첫 고객의 거래가 성사된 후 입소문을 타며 CAPA 플랫폼에 등록한 파트너사의 숫자는 10개에서 100개로 다시 500개에서 2000개로 늘어났다. 원격으로 소통을 하며 거래 업체를 찾는 과정과 견적 요청, 시제품 제작에 이어 계약까지 모두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제조 전과정의 온라인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요자는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 줄 업체를 찾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어요. 업체들도 고객을 유치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견적을 받는 것조차도 어려웠고요. 일반적인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업체를 찾고 견적을 요청하는 것이 온라인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는데 의외로 제조업 분야는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CAPA를 통해서는 그게 너무 쉽고 빠르게 이뤄질 수 있었던 거죠. MVP를 통해 가능성을 확인하고는 바로 피벗을 해서 CAPA 플랫폼에 집중했어요.”
스마트팩토리를 넘어 ‘제조 시장의 디지털화’ 필요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고객은 이제 도면과 견적요청서만 CAPA 플랫폼에 올리면 된다. 이후에는 플랫폼에 가입된 2000여개의 제조업체(파트너사)에 알람 메시지가 발송된다. 고객은 여러 제조업체가 올린 1차 견적을 비교 검토한 후 가장 최적의 업체를 선정해 함께 도면을 보며 상세한 협의를 진행할 수 있다.
CAPA가 등장하기 이전 이러한 작업은 고객과 업체 담당자가 오프라인 공간에서 만나 하나의 화면을 보며 논의하는 식으로 진행이 됐다. 협의 과정에서 논의되지 못한 사항이 발생하면 재차 만남이 필요했다. 고 대표는 CAPA를 통해 만들어 가는 변화를 ‘제조 과정의 가속화’로 설명했다.
“처음 CAPA 플랫폼을 구상할 때만 해도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가 겹치면서 비대면 문화 확산과 함께 이용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어요. 고객 만족도도 높아서 절반 가까이 재구매를 하는 상황이고요. 지금도 파트너사가 꾸준히 늘어나는 중이죠. 조만간 제조업 전용 협업 툴인 ‘CAPA 커넥트’도 선보일 예정이예요. 제조업체와 고객이 3차원(3D) 도면을 공유하며 협업할 수 있는 서비스죠.”
그 외에도 에이팀벤처스는 3D 도면을 인식하는 알고리즘으로 제조 난이도와 비용을 예측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제품을 만드는 원자제와 부피는 기본이며 도면 상으로 쉽게 파악하기 힘든 특정 형상의 가공 견적도 분석하는 기술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제까지 제조업 분야에서 견적을 하나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리소스가 투입돼야 했어요.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또 제조성검증이라고 해서 과연 가공을 할 수 있는 것인지까지 파악해야 하는 등 견적을 내는데 전문적인 검토가 필요했죠. 이것조차도 일이 되니 경우에 따라서 견적 비용을 받는 업체도 있었고요. 하지만 자동 견적 시스템이 완성되면 실제 제조 단가에 근접한 견적이 빨리 나올 수 있게 돼요. 현재 연구개발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고, 테스트 중이예요.”
제조업 분야의 니즈를 담은 고객의 요구사항과 이에 응하는 제조업체의 모든 정보는 CAPA 플랫폼을 통해 오가게 된다. 개발 완료를 앞둔 견적 시스템과 도면을 공유하는 협업 툴인 ‘CAPA 커텍트’ 역시도 플랫폼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에이팀벤처스가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데이터’다.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데이터는 또 다른 비즈니스 가능성을 점치게 하는 보물과 같다.
“제조에 관련된 데이터가 존재하는 곳이 많지 않아요. 현재는 플랫폼 고도화에 집중하고 있지만 향후에는 데이터를 활용한 비즈니스도 고민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미래가 도모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 플랫폼을 거치는 제품 중에는 미래를 바꿔 놓을 혁신적인 제품들도 있겠죠. 그렇게 되면 향후에는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데이터를 앞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 외에도 에이팀벤처스가 보유한 경쟁력은 다양하다. 그 중 하나가 ‘도면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에이팀벤처스는 캐드 프로그램에 특화된 드랍박스(DROPBOX) 형태의 서비스인 'CAPA 클라우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저희는 기본적으로 IT기업이에요. 향후에도 CAPA 플랫폼을 고도화시키면서 고객과 제조업체의 편의성을 제고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서비스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간 제조업의 커뮤니케이션, 소통 부분이 소외돼 있었다는 의미기도 하죠. 저희는 그 부분에 집중해 고객들이 서비스에 락인(Lock-in)되고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요소들을 개발할 생각이예요. 물론 국가에서도 이런 부분에 정책적인 관심을 보인다면 더 좋겠죠. 사실 제조업 현장은 이미 상당한 디지털화가 진행 돼 있어요. 가령 스마트공장 같은 거죠. 하지만 정작 제조를 할 때 필요한 프로젝트 매니징이나 솔루션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수요와 공급이 이뤄지는 제조 시장의 디지털화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어요. 이제는 공장 자체를 넘어 제조의 클라우드화, 연결의 디지털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우주인 후보자라는 이름, 개척자(Pioneer)의 삶을 살게 해
다시 시계를 돌려 과거로 돌아가 보면 그의 오늘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난 미국에서의 경험이 있기에 가능했다. 미국으로 떠날 당시 그가 처음 목표로 한 것은 항공우주 분야의 정책을 수립하는 행정가였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우주인 프로젝트가 일회성 이벤트로 단절된 이후 몸담았던 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의 생활을 겪으면서 갖게 된 목표였다.
“(항우연에서) 뭔가 도모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 제프 베조스나 리처드 브랜슨 등이 성공한 민간 우주여행이 대단한 것은 무려 17년의 기간이 걸렸다는 거예요. 그에 앞서 개발 기간까지 포함하면 더 걸린 거겠죠. 이런 위대한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걸 보며 제가 느끼는 감정은 회한의 차원이 아니에요. 오히려 거대한 드라마를 본 느낌이죠. 만약 우주인 프로그램도 일회성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 유인 우주선을 만들고 사람을 태워 띄우는 긴 호흡으로 진행됐다면 함께 도전해 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전 제가 받은 관심과 혜택을 환원할 수 있는, 적어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있었어요.”
하지만 대개의 경우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운명이었다고 할까? 그의 앞에 펼쳐진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 공공정책 대학원에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합격해 떠난 길이지만 그에 앞서 싱귤래리티 대학(Singularity University)에서 접한 10주간의 창업캠프에 온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하버드가 보장하는 명예도 미리 예정돼 있던 목표도 모두 뒤로한 선택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놀라운 것은 당시 그와 같은 경험을 한 한국인이 그를 포함해 단 두 명이 있고 그중 한 명이 코빗의 유영석 창업자라는 사실이다.
창업캠프 참여자들에게 주어진 팀별 프로젝트 과제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을 활용해 향후 10년간 10억명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디자인하라’ 였다. 거기서 고산 대표는 ‘3D프린터’에 유영석 코빗 창업자는 ‘블록체인 기술’에 주목한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와 의기투합해 ‘타이드 인스티튜드(TIDE INSTITUTE)’를 설립하고 우리나라에 메이커 무브먼트의 개념을 들여왔다.
“지금도 저나 유영석 이사 모두 타이드 인스티튜드 사외 이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엊그제도 이사회가 있어서 만났는데요(웃음). 당시 경험은 저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러면서 유 이사와 ‘이런 것을 우리나라에도 정착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타이드 인스티튜드를 통해 팹랩(Fablab) 과 같은 메이커 스페이스가 전국 각지에 생겨 나며 나름 ‘사회에 기여를 했다’는 보람도 느꼈죠. 또 그런 경험을 통해 저 역시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됐고요.”
돌이켜 보면 그의 삶이 개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오래전 운명처럼 우주인 프로젝트를 만난 순간부터가 아니었을까. 당시의 기억을 반추하게 하는 질문에 그는 “그 이후 굉장히 밀도 있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지금의 그는 ‘CAPA’를 통해 또 다른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저를 포함한 에이팀벤처스 사람들 모두 CAPA라는 서비스를 바탕으로 지향점을 갖고 모였으니, 이것 역시 우리만의 우주선을 만들어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우선은 국내에서 제조업 커뮤니케이션 시장의 디지털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집중할 계획이예요. 그게 어느 정도 완성되면 해외 시장 진출을 생각하고 있어요. 이 분야의 디지털 혁신은 미국이나 중국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그런 경험이 쌓인다면 국경을 넘는 연결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진짜 우주는 CAPA를 성공시키고 난 후 직원들과 함께 여행으로 떠나고 싶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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