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KTX가 처음 개통되던 해의 기억은 많은 이들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다. 기자 역시 당시 모 영화전문지 대학생 기자에 선발돼 부산영화제 취재 차 들뜬 마음으로 KTX를 처음 탔던 기억이 떠오른다. 덕분에 첫 KTX탑승의 기억은 같은 날 ‘제9회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던 왕가위 감독의 ‘2046’과 교차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2046’의 주인공 주 선생(왕조위 배우)은 신비로운 기차를 타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2046년으로 떠나는 사람들에 관한 SF 소설을 쓰는 작가였던 탓이다.
당시 온 국민의 기대와 관심 속에 개통된 KTX는 영화 ‘2046’의 신비로운 기차처럼 한국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었다. 20년이 지난 현재 KTX는 8개의 노선 69개 정차역으로 확장되며 이동의 혁신을 이뤄낸 주요 교통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이동의 혁신은 지역 간 교류를 확대 시키고,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해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세계 각국이 연구 개발을 진행 중인 새로운 초고속철도 시스템, 하이퍼루프가 일으킬 변화는 고속철도를 능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올해는 2004년 4월 1일 개통된 KTX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테크42는 각국에서 진행되는 하이퍼루프 개발 상황, 한국형 하이퍼루프로 부리는 ‘하이퍼튜브’의 기술 경쟁력을 짚어보고 최근 개최된 국제로봇비즈니스컨퍼런스에서 만난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이진호 책임연구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 모으는 하이퍼루프
시속 300km로 달리는 KTX가 운행을 시작한 이후 4~5시간 걸렸던 서울, 부산간 이동 시간은 2시간여로 줄었다. 전국 어디든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이퍼루프 상용화 시 예상되는 시속은 1200km 정도다. 속도만 계산해보면 KTX보다 4배가 빠른 셈이다. 멈추지 않고 직행으로 간다면 서울에서 부산을 20분 내에 주파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이퍼루프라는 단어는 음속을 의미하는 ‘하이퍼소닉(Hypersonic)’과 고리 혹은 선로를 의미하는 ‘루프(Loop)’가 합쳐진 것이다. 말 그대로 음속에 준하는 수준의 속도를 내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대기압의 1000분의 1인 아진공 상태의 튜브와 초전도 자석을 활용한 자기부상 기술이다. 기존 철도 시스템과 달리 공기 저항과 마찰 저항이 없어 이론적으로는 최대 시속 1280km를 달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공기의 평균 시속(900km)과 비교하면 그 정도가 단번에 이해될 것이다.
하이퍼루프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계기는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20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30분이면 주파할 수 있다’며 자사 블로그에 50페이지 분량의 ‘초고속 진공열차 하이퍼루프 프로젝트’ 구현 계획을 발표하면서 부터라고 알려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론 머스크의 하이퍼루프 기술 발표 이전부터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하 철도연)이 2009년 ‘하이퍼튜브(HTX)’라고 명명한 초고속 튜브철도 기술연구를 세계 최초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 진행된 ‘국제로봇비즈니스컨퍼런스’에서 만난 철도연의 이진호 책임연구원은 강연 서두에 철도연에서 제작한 하이퍼루프 개념 영상을 소개하며 “하이퍼루프가 상용화될 시 부산 해운대에 사는 사람이 집 문을 나서면 30분 만에 서울 직장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며 하이퍼루프에 핵심 기술을 설명했다.
“하이퍼루프는 초고속에서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아진공 튜브에서 주행을 합니다. 초고속 주행 시 문제가 될 수 있는 마찰과 소음을 줄이기 위해 자기부상 상태로 운행이 되죠. 즉 이 두 가지 큰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새로운 개념의 교통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초 일론 머스크가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미 1800년대 영국에서 진공 열차 개념이 아이디어로 적용될 적이 있고, 이후에도 비슷한 개념의 아이디어들이 연구로 진행된 적이 있죠.”
하이퍼루프 개발 경쟁에 뛰어든 주요국들
현재 하이퍼루프 개발 경쟁은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 중국, 캐나다, 유럽에서는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의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우선 하이퍼루프의 핵심 기술 중 하나인 자기부상열차를 먼저 개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데, 오는 2027년 독자적인 초전도 방식 신칸센인 ‘리니어 츄오 신칸센’을 개통하겠다는 발표를 한 바 있다. 최근에는 2034년까지 미뤄질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지만, 일단 상용화 기술을 개발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자기부상열차만 해도 그 속도가 최고 시속 505km라고 알려져 있다.
한편 중국은 지난 8월 중국 항공우주과학공업집단공사에서 산시(山西)성에 세운 2km 가량의 고속비행기지 초고속 저진공 자기부상열차 시험선로의 시스템 검증시험을 통해 최대 시속 1000km의 고속비행열차(하이퍼루프의 중국식 명칭) 1단계 시험에 성공했다는 발표를 한 바 있다. 다만 글로벌 업계에서 보는 신뢰성은 낮은 상황이다.
다만 이 책임연구위원에 따르면 중국은 적어도 시속 430km로 달릴 수 있는 자기부상 철도가 상하이 푸동공항과 시내를 잇는 구간에서 상업 운행을 하고 있고 현재는 시속 600km로 업그레이드하는 연구개발이 진행 중이다.
그에 앞서 2014년 설립된 영국 버진 그룹의 ‘하이퍼루프 원’은 여러가지 문제로 지난해 폐업 했지만, 하이퍼루프 주행실험에서 최고 시속 309km를 기록했고, 최근인 지난 2020년 11월에는 500m 시험트랙에서 최고 속도 시속 172km로 세계 최초 유인 주행시험에 성공한 바 있다. 앞서 지난 2019년 9월에는 UAE 국영 항만·터미널 운영사 DP월드와 공동 개발을 통해 당시 아부다비국제전시장에서 개최된 ‘세계에너즈총회’에 하이퍼루프 실물을 공개하기도 했다.
미국의 하이퍼루프 개발 기업 ‘HTT’이 경우는 지난 2019년 프랑스 툴루즈 지역에 위치한 R&D센터에서 실물 크기의 하이퍼루프 터널을 완공해 시험을 진행 중에 있다.
캐나다의 트랜스포드 역시 오는 2035년까지 승객 50명 남짓, 화물 10톤을 싣고 시속 1000km를 주파하는 ‘플럭스제트’ 개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스타트업인 하르트 하이퍼루프는 가장 최근인 지난 9월 420m 길의의 튜브 내부를 캡슐이 부유해 이동하는 테스크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는 네덜란드 초고속 열차 관련 시설인 유러피언 하이퍼루프 테스트 센터 지하 튜브에서 진행됐는데, 캡슐의 안정적 이동을 테스트하는 시험이었다. 하르트는 연내에 시속 100km 속도 구현과 차선 변경을 포함한 두 번째 테스트를 실시하고, 오는 2027년까지 시험노선이 증설되면 최고 시속 700km까지 주행과 안전 성능 시험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독일의 뮌헨공과대학이 개발 중인 하이퍼루프는 시제 차량을 제작했고 2019년 ‘스페이스X 하이퍼루프 콘테스트’에서 시속 463km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아진공 튜브 내에 실제 유인 주행시험을 시행하기도 했다.
한국형 하이퍼루프, ‘하이퍼튜브(HTX)’ 기술은 어디까지 왔나?
이진호 철도연 책임연구원은 한국에서 개발되고 있는 하이퍼루프, ‘하이퍼튜브(HTX)’의 개발 발향성을 크게 세 가지로 꼽았다. 우선 첫 번째는 공기 저항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량형 소형 캡슐 형태의 탑승선이다. 20명에서 40명 정도 탈 수 있는 이 탑승성은 슬립하고 가볍다는 특성 때문에 고속철도 대비 운영비가 저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거점역을 중심으로 다수 지역을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하는 방식이 검토 중이다. 이 책임연구원은 이러한 하이퍼튜브 개발의 필연성에 대해 미래 환경 변화를 언급했다.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오는 2050년 무렵이 되면 전 세계 인구의 70%가 대도시권에 거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메가시티화가 되는 것이죠. 이때 각 도시를 빠르게 오갈 수 있는 중장거리 이동 수단이 중요해 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대중교통 이용이 늘며 더 편리하고 시간이 절약되는 방식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KTX와 같은 편리성을 가지며 항공기보다 빠른 교통수단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는 친환경 교통수단의 필요성이 점점 증대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하이퍼튜브 연구 개발 현황은 어떨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난 2009년 처음 철도연 기술연구로 시작된 하이퍼튜브 연구는 이후 국토교통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의 사업으로 확대되며 2020년 11월 독자 개발한 17분의 1 축소 모형 시험에서 시속 1019km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이 책임연구원은 “하이퍼튜브 연구개발에 핵심적인 기술만 선별해 진행하고 있다”며 말을 이어갔다.
“하이퍼루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소요 기술 연구를 모두 하기 보다는 핵심적인 기술을 선별해 연구개발을 진행했고, 축소 모델을 이용해 시속 1000km 이상의 주행 속도를 얻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기밀 시험용 축소형 아진공 튜브 시작품을 구축해 성능을 확인했고, 주행 안정화 기술도 개발했죠. 각각의 기술 수준을 다른 여러 나라와 비교해보면 한국의 기술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몇몇 기술은 일본 등보다 더 앞서가고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현재도 국토교통과학기술 연구개발 종합계획 등의 정책에 하이퍼 튜브 기술개발 내용이 포함돼 있죠.”
다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유럽이나 중국 ,미국과 달리 아직 기술 실증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새만금 지역에 하이퍼튜브 실증단지를 건설하는 국토부의 하이퍼튜브 테스트베드 부지 사업이 올해부터 2032년을 목표로 예정돼 있지만 본격화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발표 말미 이 책임연구원은 사업 단계 별 운용 시나리오와 기술 사항을 소개하며 다시금 KTX 도입 당시를 떠올렸다.
“KTX 도입 당시 반대가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좁은 나라에서 고속철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교통 수단이 됐습니다. KTX 도입후 항공 수요를 상당 부분 대체했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지방 활성화가 이뤄졌죠. 지역 간 상호 교류도 증가하고 다양한 국민 생활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이퍼루프 역시 KTX와 같은 케이스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하이퍼루프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있지만, 개발에 성공하고 상용화될 경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효과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하이퍼튜브의 개발 로드맵은 총 4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 핵심기술 개발이 오는 2030년까지 예정돼 있고, 2단계 테스트베드 구축이 오는 2037년, 3단계 시범 노선 구축이 오는 2043년 4단계 운영이 2044년 이후로 계획돼 있다. 20년 후 전국을 오가는 하이퍼튜브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